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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특별산행

후기5 - 연변 투어 및 귀국

by 청려장 2010. 8. 15.

"대전고 59회, 졸업 30주년 기념 백두산 등정기"

두만강 [촬영지: 도문시, 촬영자: 임도혁]

o 기간: 2010.7.15(木) ~ 2010.7.18(日) [3박4일] o 일정: 백두산 서파종주 및 연변 투어 o 참석: 대전고 59회 (가족 포함 21명)         강규상, 구본상(子 용모), 김동환, 김세훈(妻 오성희, 子 동우), 김택길, 김황석, 백주현, 이문우, 이승학, 이재홍, 임도혁, 정용민, 정충희         송세빈, 이정식, 정선영, 최진규, 이환우 O. Intro.. I. 7월15일(木) - 출국 (인천, 목단강, 이도백하) II. 7월16일(金) - 백두산 등정 상편 (서파산문, 수비대, 5호경계비) II. 7월16일(金) - 백두산 등정 중편 (마천우, 청석봉, 한허계곡, 중식) II. 7월16일(金) - 백두산 등정 하편 (백운봉, 녹명봉, 장백폭포, 뒷풀이) III. 7월17일(土) - 연변 투어 (도문시, 용두레, 대성고, 윤동주생가 등)

용정 교외 [촬영: 임도혁]

o 이도백하 → 도문 오전 7시30분, 이도백하 국제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한다. 간밤에 술이 과했던 탓에 아침식사를 하지 못하고 버스에 올라탄다. 그 탓에 사진기 배터리 충전도 하지 못했다. 끙~

이도백하 국제호텔 [촬영: 이승학]

오늘은 도문과 용정을 둘러본 뒤 연길 시내 호텔에서 숙박할 예정이다. 모두 길림성에 속하는 지역이다.

개념도 - 길림성

그리고 길림성 내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하는 지역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중국 지린 성[吉林省]의 동남부에 있는 연변지방(이전의 간도지방)에 성립된 중국 내 유일한 조선족자치주. 자치주내 조선족은 81만 5,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40.7%를 차지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옌지[延吉]·투먼[圖門] 등 5개시와 3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변지역은 조선시대 말부터 조선족이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20일 소련군과 동북항일연군은 간도 임시정부를 수립했으나, 그해 11월 중국공산당은 간도 임시정부를 해산시키고 '연변행정독찰 전원공사'를 설치했고, 1948년 3월 연변전구를 창립했다. 그후 1952년 9월 3일 연변전구가 철폐되고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었으며,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되었다. 당시 자치주는 1개시와 5개현을 관할했으며, 자치주 소재지는 옌지였다.

1958년 10월 지린 시[吉林市]에서 관할했던 둔화 현[敦化縣]을 연변에 귀속시켰다. 1965년 5월 옌지 현 투먼 진[圖門鎭]과 왕칭 현[汪淸縣], 스셴 진[石峴鎭]을 합하여 투먼[圖門市]를 설립했다. 1985년 5월 둔화 현을 둔화시로 고쳤고, 1988년 7월 훈춘[琿春]·룽징[龍井] 2개현이 시로 승격되었다. 1991년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는 옌지·투먼·둔화·룽징·훈춘 등의 5개시와 안도·허룽·왕칭의 3개현을 관할하고 있으며, 자치주의 소재지는 옌지이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행정조직은 도시가두판사처 16개, 도시주민위원회 735개, 향(鄕)·진(鎭) 109개(그 가운데 진이 39개), 촌민위원회 1,394개, 자연촌 2,642개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 4만 2,700㎢, 인구 약 2,000,000명(1988).

- 출처: 브리태니커(enc.daum.net/dic100) -
오전 8시경 전세버스가 우리 일행들을 싣고 오늘의 여정을 시작한다.
부족한 잠을 벌충하기 위해 정신없이 자다보니 버스가 어딘가에 들어선다. (오전 9시50분)
장뇌삼을 파는 곳인데, 정부에서 운영하는 곳이니 믿고 사도 좋다고 가이드가 강조한다.

장뇌삼 매장

그곳에서 누가 무엇을 얼마나 샀는지는 잘 모르겠고.. 호기심 많은 오성희님이 장뇌삼 줄기를 챙겨들고 나타난다. 뿌리만을 팔고 잘라버린 것인데, 잎과 꽃이 싱싱한 채 매달려있다. 요것도 어느 정도는 효험이 있다하니, 신랑 다려줘서 동우 동생 멩그러보세여.. *^^*

오성희님

오전 10시20분, 전방 이정표가 용정이 왼편으로 45km 남았고, 우측으로 2km 가면 화룡시가 있음을 알려준다. 화룡시에는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조선독립군을 이끌고 자기보다 열배나 많은 왜군을 거의 전멸시킨 청산리 전투의 현장이 있다고 한다. 화룡시에는 또한 해발 1,621m의 베개봉이 있는데, 이 봉우리 동북쪽 골짜기에서 해란강이 발원한다고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바로 그 해란강이다. 해란강은 화룡시로부터 동북쪽으로 흘러가 용정시를 휘돈 뒤 145km를 굽이굽이 흘러 국경하천인 두만강과 합류한다고 한다.

화룡 갈림길

이후 버스는 해란강을 옆에 두고 전진한다. 그러던 중 가이드가 우측 산 위에 일송정(一松亭)이 있음을 알려준다. 산 이름은 비암산인데, 철탑이 있는 곳이 정상이고 그 앞쪽에 보이는 정자와 소나무가 바로 일송정 소나무라고 한다. 이것 역시 가곡 '선구자'의 첫 구절부터 나오는 만치 우리 귀에 너무도 익숙한 소나무다.

일송정(一松亭) [촬영: 김세훈]

원래의 일송정은 '룡정 팔경'의 하나로 정자 모양을 한 소나무를 말하는데, 일본인이 솔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 고춧가루를 넣어 고사시켰다고 한다. 독립 운동가들이 항일운동을 위해 종종 이곳에 모인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보기 싫다하여 저지른 짓이라 한다. 지금의 소나무는 후일에 다시 심은 것이라 하고, '일송정'이라는 정자는 1990년 중국 당국에서 지은 것이라 한다.
          "선구자(先驅者)"
  일송정(一松亭)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海蘭江)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조두남(趙斗南) 작곡, 윤해영(尹海榮) 작사 -


일송정 [사진출처: 천안공고 기우회, 빅맨님]

가곡 선구자(先驅者)에 얽힌 이야기

<선구자>의 배경은 만주 용정이다. 이곳은 일제시기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였다고 한다. 망명생활을 하던 조두남이 만주 모란강에서 1933년 21세 때 이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어느 해 겨울, 조두남 선생에게 병약해 보이는 젊은 윤해영이 찾아와서 자신이 쓴 <용정의 노래> 가사에 곡을 붙여주기를 부탁하였는데, 그 후 그 청년은 여러 해가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이 된 후에도 조두남선생은 끝내 윤해영 선생을 보지 못하고 만주땅을 떠나게 되었고, 남한에 정착하게 된 선생은 윤해영 선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무소식이어서 뒤늦게나마 원작제목 <용정의 노래>를 <선구자>로 고쳐서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선구자 가곡은 탄생하였는데 선구자는 나라를 잃고 이역 땅 만주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굳은 의지를 담고 있으며, 선구자 시비는 이 노래의 배경인 만주 용정시에 있었던 광명중학교(지금 중국용정중학교)의 졸업생들이 모교재건을 기념하고 선구자적 얼과 전통을 이어 계승하자는 의미로 모교 교정에 건립하였는데, 간도 용정 일대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하신 선구자들을 추모하는 비이다.

- 출처: 부산문화유산해설사회 월간 부문유 -
o 도문시 - 청기와식당 어느 사이 용정과 연길시를 관통하여 지나고, 오후 12시15분, 북한의 최북단에 인접한 도문시에 들어선 뒤 일단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시내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한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강은 두만강이고 그 너머가 북한 영토이며, 강둑 수풀 사이에 있는 지하벙커에서 북한군이 국경을 감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가는 식당은 저 북한을 코앞에 두고 식사하는 곳임을 가이드가 누차 강조하며 일러준다. VIP 가이드인 자신이 VIP 고객인 우리들을 위해 특별히 알선해서 모셔가는 것임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두만강과 북한 [촬영: 김택길]

오후 12시30분, 청기와식당에 들어선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한다.

청기와식당 [촬영: 폰카]

왼편 푸른색 지붕의 건물이 식사하는 곳인데, 정말 그 안에 앉아 있으면 북한 영토가 막바로 바라보인다. 가이드가 북한쪽으로는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하여.. 쫄아서 찍지 못하다.. 핸드폰으로 몰래 찍었는데.. ^^ 전방 강둑 너머의 전답과 그 뒷편의 산자락들이 북한 영토라고 한다.

식당 전방 - 강둑 너머 북한 [촬영: 폰카]

나중에 GPS data를 구글(Google)에 띄워보니 그 위치가 명확하게 확인된다. (빨간 선은 버스 이동궤적이다.)

청기와식당 [구글자료+GPS궤적]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라 그런지 음식은 우리들 입맛에 딱 맞고 맛도 좋다. 모두들 흡족스럽게 식사를 마친다. MB도 이곳에서 식사를 했었다나.. 모라나.. 식사후 기념촬영..

청기와식당 - 본상, 용민, 황석, 동환, 택길, 문우 [촬영: 김택길]

사진 우측에 암벽을 드러내놓고 있는 산자락이 북한 영토다. 정말 지척에 있다.

청기와식당 [촬영: 이정식]

오후 1시05분, 식사를 마치고 다시 도문시로 향한다. 도문시 시내에 들어서기 직전 관측되는 도문선 철교. 이 철교가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이어진다. 중국과 북한 사이를 잇는 기찻길은 이곳 동쪽의 도문선과 서쪽의 신의주선 두 곳 밖에 없다고 한다. 중국과 북한의 경계는 철길 중간 색상이 바뀌는 부분이라 한다. 즉, 검은색으로 채색된 철로는 중국, 흰색 철로는 북한 영역이다.

철길 - 도문선 [촬영: 김택길]

조금 후 도문 시내를 지나다 보니 우측 편으로 커다마한 게이트가 보인다. 아마도 도문선 국경통제소인 듯 싶다. 게이트 너머 다리입구에 초병이 지키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도문선 중국 국경통제소 [촬영: 김택길]

o 도문시 - 두만강 광장 오후 1시20분, 두만강 광장에 도착한다.

두만강 광장 [촬영: 임도혁]

광장 너머에 도문강 관광부두가 있다. 도문강(圖門江)은 두만강(豆滿江)의 중국 이름이다.

도문강 관광부두 [촬영: 임도혁]

부두로 내려가 보트에 올라탄다. 보트가 10인승이라서 두 배에 나누어서 탄다.

선상 친구들 [촬영: 임도혁]

보트는 일단 강류를 거슬러 남쪽으로 간다.

두만강 [촬영: 임도혁]

그 왼편에 북한의 산자락이 보인다. 바로 옆에 보이는 수풀 속에 북한측 지하벙커가 있어 북한군 초병들이 항시 이쪽을 경계하며 지키고 있다한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는 얼핏 벙커속의 초병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한다. 믿거나 말거나..

북한측 수풀과 산자락 [촬영: 임도혁]

우측은 중국 영토이다.

중국측 수풀과 게이트 [촬영: 임도혁]

그런데 앞에 보이던 다리에 접근하다보니..

다리에 접근 중 [촬영: 김택길]

북한과 중국간의 경계는 우리의 우측 편에 놓여있다. 사진 중간에 사람들이 서 있는 곳. 즉 다리 색깔이 바뀌는 부분이 경계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배가 지나는 곳은 북한 영토인 셈이다. 이곳에서는 이렇듯 국가간 경계가 융통성 있게 관리 및 통제되는가 보다.

북한과 중국간의 경계 [촬영: 임도혁]

다리 밑을 지나자 보트가 U턴을 해서 돌아간다. 우리가 배를 탔었던 부두를 지나고 북쪽으로 좀 더 간다. 도혁이 이즈음 찍은 듯 싶은 사진이 작품이다. 하늘과 강과 부두가 멋지게 어울리고 있는..

부두와 하늘 [촬영: 임도혁]

우측 편 북한측 강기슭에는 뗏목 놀이를 하고 있다. 물론 저들도 중국을 통해 이곳에 온 관광객들이다. 중국과 북한이 서로 공유하는 영역인 듯 싶은데, 중국은 이렇게 관광자원으로 이용하는 반면 북한측은 경계근무를 하는 초병만이 있다는 것이 극히 대조적이다. 이 부근의 북한쪽에는 도시나 마을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백두산 제5호경계비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폐쇄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뱃놀이 [촬영: 임도혁]

다른 보트에 편승했던 친구들과 교차해서 지나간 뒤, 우리 보트도 부두로 돌아간다.

다른 보트의 친구들 [촬영: 임도혁]

그러던 중 중국측 강둑을 지나던 츠자들이 우리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준다. 참으로 활달한 츠자들이다.

두만강 츠자들 [촬영: 임도혁]

그때 어느 '아찌'가 한 마디 한다. "얘들아~ 멀리 가지 말아라잉?" 그의 촌철살인에 친구들이 감탄을 한다. "햐~ 역쉬 프로다운 멘트여쓰.. ㅎㅎ" "저런 멘트는 우리가 배워야햐~ ㅋㅋ"

어느 아찌 [촬영: 임도혁]

보트에서 내린 뒤 기념촬영..

두만강 관광부두 - 단체사진 [촬영: 임도혁]

부두를 빠져나와 두만강광장을 가로질러 버스주차장으로 가는 길.. 어느 아줌마가 튀밥 봉다리를 들고서 우리 일행에게 접근한다. "튀밥 사세여~~~" 집요하게 접근하는가 싶더니 세훈을 낚아챈다. "아~ 튀밥 사시라니깐요?"

튀밥 사세여~~~! [촬영: 임도혁]

튀밥 사시라니깐요? [촬영: 임도혁]

저 미모의 두만강 아줌마는 나중 우리 일행이 귀국한 후 대전에서의 뒷풀이에도 동우와 함께 나타난다. '정말 집요한 아줌마다'라고 생각했는데, 뒷풀이 비용을 쏘고 난 뒤 세훈을 팽개치고 동우와 함께 사라진다. 정말 쿨한 아줌마다. ㅎㅎ (잘 먹었어요! ^^)

두만강 아줌마, 세훈과 동우 [촬영: 임도혁]

도문시 일대에서의 궤적을 Google 지도에 띄우니, 두만강에서 보트를 타고 왔다 갔다 한 궤적이 잘 나타나있다. 당시 접근했던 다리는 도문선 철교가 아닌 육교이다. 도문시에는 북한으로 이어지는 철교뿐만 아니라 승용차로 넘어갈 수 있는 육교도 있다. 이처럼 중국과 북한 사이를 잇는 육교와 철교가 모두 있는 곳은 도문시가 유일하다고 한다.

도문시 [구글지도 & GPS 궤적]

o 용정 용두레 우물 오후 1시40분경, 도문시를 빠져나와 두만강을 왼편에 두고 남진한다. 오후 2시15분경, 개산이라는 마을에서 두만강변 도로를 벗어나 내륙쪽으로 들어선다. 오후 2시50분경, 용정시내에 진입한 뒤 '용두레 우물' 입구에 도착한다. 이곳이 '용정(龍井)'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우물이 있는 곳이라 한다.

용두레 우물 입구 [촬영: 임도혁]

용두레우물은 공원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용두레 우물과 주변 풍경 [촬영: 임도혁]

1870년대까지만 하여도 황량한 무인지대였던 용정 일대에 조선 이주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들어왔다고 한다. 용정은 토지가 비옥하고 우량이 충족한 기후 때문에 벼농사 짓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어서 이 일대에서 서로 합심하여 움막을 짓고 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고 밭 갈고 씨 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터를 잡고 농사를 짓던 어느 날 이곳에서 우물자리를 발견하여 용두레를 설치하니 더욱 많은 조선족들이 이 부근에 몰려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용두레우물 [촬영: 임도혁]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2부의 주요 무대가 이곳 용정이다. 조준구에게 땅을 빼앗긴 서희는 충직한 하인 길상 등과 함께 탈출하여 윤씨부인이 남긴 금괴를 자본으로 장사에 성공하여 거부가 되고, 길상과 혼인하여 조준구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가는 곳이 이곳 북간도 용정이다. 국권상실, 봉건 가부장체제와 신분질서의 붕괴, 농업경제로부터 화폐경제로의 변환 등 1900년대 초반 한국사회의 변화를 밑그림으로 담아놓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토지 2부의 시대적 배경이 용정에 많은 조선족이 모여살기 시작할 시기와 대략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공원 한켠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용정지명기원지정천 [촬영: 임도혁]

용두레 우물 <龍井地名起源之井泉>
1886년 봄 정준이라는 젊은이가 우연히 옛 돌각담 밑에 파묻힌 우물 하나를 발견하였다. 우물에서 나온 물이 깨끗하고 맛도 좋다. 한 마을에 살던 충서방이 용두레를 만들어 물긷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 마을을 <용두레 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때 이곳에 정착한 장인석씨가 마침 학식이 좀 있는지라 박윤언과 상의하고 <용두레>라는 <용>자와 <우물>이라는 <정>자를 합쳐서 <용정>이란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1934년 용정촌의 주민 이기섭의 발기로 우물옆에 2 미터 높이의 화강암을 세우고 거기에 <龍井地名起源之井泉>이라고 글씨를 써넣었다. 이것이 용정(龍井)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것이다. - 출처: 불명 -
어느 비석 뒷편에는 물을 긷고 가는 처녀가 조각되어 있다. 이 우물에 얽혀있는 전설과 관련 있는 조각이리라 짐작하였는데 역시 그렇다.

물 떠가는 처녀 [촬영: 폰카]

잉어가 되어 우물에 빠져 있었던 용왕의 아들을 이 처녀가 구출해줬고.. 서로 사랑을 하다가 이루지 못하여 결국 처녀가 우물에 투신했다가 용이 되어 사라졌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용두레 우물의 전설

먼 옛날 해란강기슭의 작은 마을에 아름답고 선량하고 부지런한 처녀가 살고 있었다. 처녀는 늘 강가에 나가 빨래를 하였는데 하루는 장난꾸러기들의 손에서 거의 죽어가는 잉어를 구하여 물에 놓아주었다. 이 작은 잉어는 원래 동해용왕의 셋째 아들 이였는데 천국계율을 위반하였기에 용왕이 그를 작은 잉어로 변하게 하여 강에 처넣었던 것이다. 잉어는 처녀의 손에서 다시 새 생명을 얻은 은덕에 감지덕지하여 처녀가 빨래질할 때마다 처녀 앞에서 헤엄치며 노닐었다. 처녀는 잉어가 다시 애들한테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작은 잉어를 마을의 우물에 넣어주었다.

그날 저녁 잉어가 걱정되어 살그머니 우물에 와보니 영준한 총각이 처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잉어가 총각으로 변했던 것이었다. 이때로부터 이들은 달빛아래에서 아름다운 그림자를 남기면서 뜨거운 사랑을 속삭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에도 차디찬 서리가 내렸으니 이들의 혼인을 부모들이 결사반대하였던 것이다. 사랑에 더없이 충성한 처녀는 죽어서도 총각과 함께 있으리라 결심하고 우물에 뛰어들었다. 순간 우물 속으로부터 한 마리 청용이 치솟아 오르며 처녀를 받쳐 들고 멀고먼 하늘나라로 유유히 사라졌다. 이때로부터 용이 날아오른 우물이라고 하여 이 우물을 용정이라고 하였고 처녀가 살던 마을을 용정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출처: 역사학도서관(http://kll.kll.co.kr/element_express) -
우물가 주변의 공원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앉아 있다. 그리고 공원 구석구석에는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화토를 치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공원 시민 [촬영: 임도혁]

화투판 [촬영: 폰카]

o 용정중학교와 대성중학교 오후 3시5분경, 용정중학교에 간다. 뒷편 운동장 너머에 있는 학교가 현재의 용정중학교로서 예로부터 조선족만이 다니는 학교라고 한다.

용정중학교 [촬영: 임도혁]

오른편에 전시관으로 이용되는 대성중학교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

대성중학교와 윤동주시비 [촬영: 임도혁]

용정중학교, 대성중학교, 윤동주.. 서로의 상관관계가 아리송하여 정리해보면.. 용정중학교는 일제 시절 개교한 은진중, 대성중, 명신여중, 동흥중, 광명중, 광명여중 등 6개 학교를 해방 후 1946년 통합한 학교다. 해방후 용정중학에 편입된 6개 학교 중의 하나인 대성중학은 20년대와 30년대 용정 반일투쟁의 선봉이던 학교이기 때문에 그 교사를 이곳에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윤동주는 대성중학 출신이 아닌 은진중학 출신이다. 그 학교도 용정중학에 통합된 학교 중의 하나이기에 그의 시비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용정중학교, 대성중학교, 윤동주

용정중학은 반일구국과 민족의 넋을 꽃 피우던 배움의 샘터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은진중학, 명신여자중학, 동흥중학, 광명중학, 대성중학, 광명여자중학 등 6개 중학교가 1946년 통합하여 용정중학이 됐다. 옛 간도의 대명사인 용정중학은 수많은 인재를 걸러냈다. 1,800명의 졸업생들이 세계 18개국에 살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정계, 군계, 재단, 기업 등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 이들 중 우리에게 알려진 인사는 문익환 목사, 정일권씨(육군참모총장 역임), 이상철 목사(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 역임), 정대희 목사(밴쿠버 거주, 전 건국대학교 총장) 등이다.

용정중학 교정에는 20년대와 30년대 용정 반일투쟁의 선봉이던 대성중학의 교사(校舍)가 역사보존 건물로 남아있다. 1921년 건립된 이 건물은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어 무너질 위기에 직면한 것을 용정시 정부, 한국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주선과 금성출판사 김낙준 회장의 지원으로 옛모습대로 94년에 복원했다. 이 건물의 2층에는 역사전시관이 들어섰다. 학교창립 65주년을 맞이해서 세운 역사박물관에는 옛 간도에서의 우리민족의 개척사, 문화교육의 발자취, 반일민족독립의 역사와 용정중학으로 통합된 6개 중학의 역사가 글과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대성중학 앞에는 용정이 낳은 저항시인 윤동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윤동주는 우리민족이 낳은 저명한 저항시인이다. 1917년 12월31일 용정시 지산에서 출생한 윤동주는 은진중학과 평양숭실대학과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동경 입교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1943년 경도경찰에 체포되어 45년 후쿠오까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처럼 갈망하던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용정 동산교회묘지에 고요히 잠들고 있다.

- 출처: 불명 -

운동주시비와 친구들 [촬영: 임도혁]

대성중학 건물 안으로 들어가 안내인의 말을 경청한다.

안내 [촬영: 임도혁]

경청 [촬영: 임도혁]

용정 이주초기의 모습과 민족교육 선구자들의 활동상..

이주초기

선구자들 [촬영: 김택길]

청산리 전투, 안중근 의거 등 북간도 일대에서 우리민족이 펼쳤던 항일운동 등이 소개되고 있다.

청산리전투 [촬영: 김택길]

안중근 의거 [촬영: 김택길]

전시관 관람을 마친 후 방명록에 서명하면서, 역사전시관의 발전을 위한 기부금을 적시한다. 대략 친구들 개개인이 10,000원씩 하는 것이 대세였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제안을 한다. 우리가 졸업 3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 왔으니 공동경비로 30만원을 기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기부 서명 1 [촬영: 임도혁]

기부 서명 2 [촬영: 임도혁]

모두들 흔쾌히 찬성하여, 보급대장이며 총무인 황석이 대표로 서명하고 30만원(1,500위안)을 기부한다.

30주년 기념 기부서명 [촬영: 임도혁]

전시관 관람을 마친 후 윤동주 시비 앞에 다시 모여서 도혁이 준비해온 대형 프랜카드를 펼쳐놓고 기념촬영을 한다.

윤동주시비와 친구들 [촬영: 임도혁]

그때 갑자기 역사전시관장이 나타난다. 단체로 기부한 30만원과 20명 개개인이 기부한 1만원씩을 합하면 대략 50만원을 우리가 전시관에 기부한 셈인데, 나중 가이드의 말을 들으니 그 정도의 거금을 기부한 단체는 그 동안 없었다고 한다. 그런 정도이니 우리 일행의 기부소식을 전해들은 관장님이 깜짝 놀라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이곳에 나타난 것이라 한다.

대성중학 역사전시과장의 출현 [촬영: 임도혁]

고마움의 증표로 윤동주 추모사업회에서 발간한 "윤동주 전기"를 우리에 전달한다. 암튼, 우리 친구들도 의미 있는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한 맘이 된다.

"윤동주 전기"와 역사전시관장님 [촬영: 임도혁]

o 15만원 탈취사건 기념비 오후 3시40분, 용정중학교를 빠져나와 용정시의 남쪽 외곽으로 빠져나간다. 오후 3시55분, 어느 시골길의 다리를 건넌 뒤 하차한다. 가이드가 길 우측 수풀 사이로 걸어가 어느 비석을 들여다보더니 이곳이 아니네요 하며 되돌아 나온다.

5.30폭동기념비 [촬영: 폰카]

무엇을 들여다보고 오는고 하고 뒤쫓아가서 그 비석을 확인하더니 5.30폭동기념비라고 쓰여 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그것 또한 항일운동의 흔적이다. 5.30 폭동은 1930년 5월 30일 간도지방에서 일어난 반일무력투쟁으로서 황진연의 지휘 아래 일제의 영사관과 동양척식회사 출장소 등에 폭탄을 투척했으며, 철도 및 교량 등을 파괴한 사건이라 한다.

530폭동기념비 [촬영: 폰카]

가이드가 찾고자 한 것은 가까운 길가 왼편에 있었다. 15만원탈취사건기념비다.

15만원탈취사건기념비 [촬영: 임도혁]

15만원 탈취사건은 일제 강점기 이곳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들이 일본 은행의 현금수송차량을 급습하여 15만원을 탈취했던 사건이라고 한다. 당시의 15만원은 5,000여명의 독립군을 무장시킬 만 한 돈이니 꽤나 큰 돈이었던 것 같다.

15만원사건기념비 [촬영: 임도혁]

이 사건이 얼마 전에 개봉되었던 영화 "놈놈놈"의 모티브가 된 것이라 한다.
15만원 탈취사건

15만원 탈취사건이란 요즘으로 말하자면 은행 현금 수송차량 탈취사건인데, 15만원이 어느 정도 큰돈이냐 하면 5000여명의 독립군을 무장시킬 만 한 돈이라고 한다. 요즘 나온 영화 '놈놈놈'이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했다. 김지운(43) 감독은 인터뷰에서 "'놈놈놈'을 만든 계기는 고(故) 이만희 감독의 액션영화 '쇠사슬을 끊어라(1971년)'였다"며 "영화에 등장하는 30년대 만주에서 나라를 빼앗긴 무정부주의자, '쿨'한 주인공들의 성격을 차용해 '세 놈들'의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고백해 화제가 됐는데, 바로 만주를 배경으로 한 모든 웨스턴물의 진짜 동기가 된 사건은 다름 아닌 1920년 1월 4일 만주 용정시 인근 동량어구에서 벌어진 '15만원 탈취사건'이다.

당시 무장독립조직인 '북로군정서' 소속 최봉설, 임국정, 윤준희,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 철혈광복단 단원 6명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출장소로 '반일투쟁탄압경비'조로 15만원을 수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들은 1920년 1월 4일 오후 8시 용정 어귀에 매복하고 있다가 현금수송마차를 습격해 5명의 무장 호송대를 사살하고 철궤에 담긴 지폐 15만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다. 이들은 농부로 가장한 뒤 돈 짐을 메고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무기 구입 원정길에 나선다.

이들은 약 3만정의 중고 소총을 구매하는 계약 직전단계까지 갔는데, 여기서 안중근 의사와 함께 활약했던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 엄인섭이라는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엄인섭은 1914년까지는 항일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나 나중 변절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상이자 일본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거금을 보고 즉각 일본군에 밀고하고, 결국 최봉설 등을 제외한 4명의 철혈광복단 단원과 신한촌의 조선인 반일전사 500여명이 붙잡힌다. 이들은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13만원 이상의 현금 역시 고스란히 일본 은행으로 반납됐다.

군자금을 조달하려는 독립운동가, 이들을 잡으려는 일본, 그리고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힌 변절자, 만주를 배경으로 한 15만원 탈취사건은 영화적 요소가 다분하다.

- 출처: 신현수의 만주기행 <2> 항일의 땅, 용정을 가다 (부평신문) -


영화 포스터 - "놈놈놈"


15만원 탈취사건 주모자

이 부근에 현금수송마차의 습격 현장이 있다고 하는 데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

탈취사건의 현장 [촬영: 임도혁]

o 윤동주 생가 오후 4시10분경, 버스가 도착한 곳에 명동이라는 입석이 있다. 윤동주가 태어난 마을의 지명이 바로 '명동'이다.

명동 입석 [촬영: 김택길]

입석 안쪽으로 윤동주 생가가 있다.

윤동주 생가 [촬영: 폰카]

아담한 기와집이다.

윤동주 생가 [촬영: 임도혁]

윤동주 생가
시인 윤동주 생가는 1900년경에 그의 조부 윤하현 선생이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 구조였습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이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이 집을 팔고 용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습니다. 1993년 4월 명동촌은 그 역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용정시정부에서 관광지로 지정하였습니다. 이에 지시향정부와 용정시 문련은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역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습니다. - 출처: 1994년 8월 29일, 룡정시지신향인민정부,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 -
전형적인 팔작지붕 구조다.

윤동주생가 [촬영: 임도혁]

내부에는 비교적 넓은 방과 주방이 갖춰져 있다.

주방의 솥과 항아리 [촬영: 임도혁]

방 한켠에는 서거 64주기 추모제단이 놓여있다.

윤동주 서거 64년 추모 [촬영: 임도혁]

짧은 생애였고.. 비극적인 종말이었고.. 어느덧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가 살아온 부끄럼 없는 삶과 그가 남긴 아름다운 언어는 아직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영원한 청년시인 윤동주를 한국인은 정녕 잊지 못할 것이다.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2.30~1945.2.16)

윤동주의 아명은 해환. 북간도 명동촌 출생.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 29년 문예지 《새명동》발간에 참여하였고, 31년 대랍자의 중국인관립학교를 거쳐 32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옮겼으나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자,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다. 42년 일본 리쿄대학 영문과 입학, 그해 도시샤대학으로 전학하였다. 43년 귀국 직전에 항일운동을 한 혐의로 송몽규와 함께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규슈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중 45년 옥사하였다.

당시 형무소측에서는 사인이 뇌일혈이라 하였만 윤동주와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혀 있던 사촌 송몽규는 자신과 윤동주가 주사를 맞아서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몽규도 한 달 뒤 숨져 생체실험을 둘러싼 의문은 오랫동안 미궁에 빠져 뭍혀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일본인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지가 비교적 구체적인 증언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는 윤동주가 맞았던 주사가 생리 식염수를 수혈하는 생체실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전쟁 중이던 일제가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윤동주 초상 1


윤동주 초상 2


윤동주 친필

윤동주의 시는 초기 시부터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쉽게 쓰여진 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적 변모를 드러내고 있다. 초기 시 《겨울》 《조개껍질》 《버선본》 등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후기 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에서는 역사감각을 지닌 자아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자전적이고 내성적인 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실존적 윤리의식,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에 성실했던 민족의식을 나타낸 시를 썼으며, 이러한 주제를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기법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용정에 묻혔고, 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 출처: 불명 -

기념촬영 [촬영: 임도혁]

o 3.13 반일의사릉 오후 4시20분, 윤동주 생가에서 나와 다시 용정 쪽으로 되돌아간다. 오후 4시40분, 용정시내에 다가갈 즈음 길 우측 쪽길로 들어선다. 그곳에 3.13 반일의사릉이 있다.

3.13 반일의사릉 [촬영: 임도혁]

1919년3월1일 본토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이곳에서도 반일 물결이 전파되었는데 그해 3월13일 명동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된 약 3만명의 군중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시위를 하며 일제를 성토하였다고 한다. 이 시위대가 일본총영사관으로 가던 중 일제군경들의 무력 저지로 17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때 희생된 분들을 이곳에 모셔두었다고 한다.

313 반일의사릉 [촬영: 임도혁]

일제히 묵념..

묵념 [촬영: 임도혁]

묵념 [촬영: 임도혁]

비석 뒷편에 당시 희생한 17명의 순난의사(殉難義士) 이름과 함께 아래와 같은 글을 새겨놓았다. "1919년 3월 13일에 일어난 반일시위는 연변지구의 조선족 인민군중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과 중국침략 정책에 저항하고 분연히 일어나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벌인 군중적 혁명투쟁이다. 같은 달 17일 룡정합성리 공동묘지에서 순난의사들을 안장하는 의식을 성대히 거행해 일본제국주의와 지방당국의 잔혹한 죄행에 항의하였다."

비석 [촬영: 임도혁]

묘역 앞에 보이는 용정 교외의 풍경이 아름답다.

용정 교외의 풍경 [촬영: 임도혁]

오후 4시50분, 3.13 반일의사릉을 빠져나와 용정으로 향한다. 용정시를 지날 즈음 다리 하나를 넘는다. 그 다리 좌우로 흐르는 강이 해란강이라 한다. 우리민족의 애환이 담긴 강줄기를 내다보는 황석의 얼굴이 숙연하다. (정말 그런거여쓰? ^^)

해란강과 황석 [촬영: 오성희님]

o 연길 평양식당 오후 6시30분경, 연길시 중심가에 위치한 국제호텔에 여장을 푼다.

연길의 호텔

오후 6시50분경, 북한인이 운영하는 '평양유경'이라는 식당으로 간다.

평양유경 [촬영: 폰카]

처음엔 잠잠히 식사를 한다. 그런데 가이드가 소개한 바로는 서해안에서 직접 공수해온 싱싱한 해물이 푸짐하게 나올 것이라 했는데 식탁 위에 올려진 해물이라고는 달랑 조개 한 접시다. 그것도 그닥 싱싱해 보지지도 않은.. 택길이 툴툴 거린다. "하여간, 가이드가 뻥이 쎄.. 서해안 해물이 그득하다고? 아~ C팔~" 해물에 대한 기대치가 컸기에 실망스러움이 다소 있었지만, 그 외의 음식은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무대 위에는 언제부턴가 북한 처녀들이 나와서 노래와 춤을 부르기 시작한다. "반~갑~습네다. 반갑습네다~~"

북한처녀 등장 [촬영: 폰카]

북한처녀의 춤 [촬영: 폰카]

그네들의 열창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그저 조용히 식사하며 점잖게 박수만 쳐주는 듯 하였는데.. 북한산 들쭉술이 한 순배 돌아 점차 주흥이 무르익어갈 즈음, 택길이 드뎌 마이크를 잡고 등장한다.

택길, 드뎌~ 마이크를 잡다! [촬영: 폰카]

어느새 무대에 진출한 그는.. 처음엔 북한처녀와 적당한 이격거리를 유지한 채 점잖게 노래만 부르는 듯 하더니만 빠른 박자의 노래가 나오자 그때부터 실력발휘를 한다. 북한처녀 손을 잡고 돌리고 돌리고.. ㅎㅎ 사관생도 시절 지루박이 그의 교양과목이였다나 모라나.. *^^*

이격거리를 유지한 채 노래.. [촬영: 폰카]

돌리고 돌리고 [촬영: 폰카]

그날밤 우리 일행은 북한처녀에게 꽃다발 5개를 앵겼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그녀들로서는 대박을 맞은 날이라고 한다. (북한은 자존심이 강해서 팁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꽃다발을 받는데 그 꽃다발 가격의 일정비율이 그들의 소득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o 연길시의 밤 밤 7시35분경, 식당에서 나와 발맛사지를 하러 간다. 밤 7시50분경, 발맛사지 업소에 도착하니 몇몇 친구들은 전신맛사지를 받겠다며 딴 방을 차린다. 규상은 발만 받으려 했는데, 맛사지사가 이쁘다 보니 전신맛사지로 종목을 바꾸겠다고 했다한다. 그러니까 업소쪽에서 맛사지사를 바꿔서 들여보내더란다. 전신맛사지사는 따로 있다 하며.. ㅎㅎ 그러고 들어온 전신맛사지사는 펑퍼짐한 아줌마라고 한다. 그래서 결국 규상은 다시 맘을 바꾸고 발맛사지만 하였다고 한다. ㅋㅋ 밤 8시반경, 발맛사지를 받은 뒤 버스에 오르니.. 택길이 가이드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한 마디 한다. "당신 뻥도 만만찮아.." ㅎㅎ

택길과 가이드 [촬영: 김택길 디카]

이후 5명의 전투사(?)들은 가이드를 따라 연길시내 깊고 내밀한 곳(?)으로 침투하였고.. 나머지는 호텔로 돌아와서 인근 슈퍼에서 중국 맥주 칭따오를 사들고 객실에 들어가 뒷풀이를 한다. 그 자리에서 우리의 다음 원정지가 진지하게 논의 된다. 태국, 말레이지아, 쿠바.. 주로 본상과 세빈이 풍부한 경험과 정보로 좌중을 휘어잡는다. 와~ 그렇게 좋은 곳이 그렇게 많이 있더냐? ^^ 최소한 2년에 한 번씩은 가자!!!

호텔 객실 [촬영: 폰카]

늦은 밤이 되자 전투사들이 한명씩 한명씩 나타난다. 잔뜩 기대에 차서 그들로부터 무용담을 들어보니, 최모씨는 조선족을 만나 만족스러웠던 모양인데.. 강모씨는 세 김씨들 땜에 지명권이 후순위로 밀려서 물이 좋지 않았다고 툴툴거리고.. 그들 일당을 몰고간 김모씨는 파트너가 한족이라 말도 안 통하고 몸도 안 통해서 헛김만 뺐다고 허탈해 한다. ㅋㅋ ☆ 지나온 길 궤적 6. 이도백하-용정-연길-도문 [거리: 220km, 소요시간: 5시간07분] 궤적 7. 도문-용정-윤동주생가-연길 [거리: 121km, 소요시간: 3시간30분]

궤적6 - 이도/연길

궤적7 - 도문/용정/연길

IV. 7월18일(日) - 귀국 (연길시, 왕청, 목단강공항, 인천)

서명 1 - 후지산지팡이 [촬영: 임도혁, 뽀샾: 정충희]

o 연길 → 목단강 오전 7시정각, 아침식사를 마치고 짐을 꾸린 뒤 호텔 밖으로 나와 가이드가 체크아웃을 마치기를 기다린다.

호텔 밖 - 체크아웃 대기

호텔 밖 난간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친구들..

친구들.. [촬영: 임도혁]

그중 택길은 지난 밤의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 하다. "아~ C발.. 한족이다보니 말도 안 통하고.." ㅎㅎ

택길의 무용담

그 옆에서는 친구들이 지팡이에 서명을 하고 있다.

찍사와 서명자

저 지팡이는 2007년 7월 후지산을 오를 때 가져갔었던 것으로서 당시의 용맹했던 기상을 계승하기 위해 차기 원정산행에도 가져가자고 결의하였던 바 금번 백두산 등정시에도 가지고 올라간 지팡이다. 이제 백두산 등정을 무사히 마치었으니 다시 저 지팡이에 서명하는 것이다.

서명 2 - 후지산 지팡이 [촬영: 임도혁, 뽀샾: 정충희]

서명 3 - 후지산 지팡이 [촬영: 임도혁, 뽀샾: 정충희]

지팡이의 중단에는 후지산 등정대원인.. 김동환, 신희권, 이승학, 이재홍, 김세훈, 양현모, 정택윤, 유병훈, 최운식, 송동암, 이환우, 이문우, 김황석, 정충희 등의 서명이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다.

후지산 지팡이

후지산 지팡이 설명도

체크아웃이 무사히(^^) 끝났나보다. 이도백하 호텔에서 겪은 바가 있어 체크아웃이 또 지체되기에 신경이 쓰이던 차라 죄진 것 없이 긴장했던 맘을 그제야 풀어놓는다. 어제 이도백하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던 중 우리 일행이 머물던 객실에서 베개 커버 하나가 오염되었다며 호텔 측에서 변상을 요구하였다. 쓰지도 않은 베개를 가지고 그렇게 우겨대니 억울하기 이를 데 없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발만 동동 거리다가 가이드가 적극 개입하여 결국 변상 없이 해결되었지만 찜찜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 7시20분, 버스가 출발한다. 이제 3박4일의 일정을 마치고 공항이 있는 목단강시를 향한다. 오전 9시경, 왕청(汪淸)을 지난다. 왕청은 연길시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현으로서 이곳 역시 길림성 관하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한다.

왕청

왕청(汪淸)
연변의 북부에 자리하고 있는 왕청현은 현 산하에 8개 진,10개 향,226개 촌이 있으며 총면적은 8994평방키로미터이다. 인구는 28만 명인데 조선족은 30% 조금 넘는다. 옛날에 왕청현은 변강의 요새라서 군대를 주둔시켰으므로 《보루》라고 하여 만주어로 《왕친》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변하여 왕청이 되었다고 한다. 토지가 비옥하고 가야하, 수분하가 흘러 농업이 발달하고 또 산간지에 있어 야생식물과 동물자원, 광산물자원이 풍부하다. - 출처: 다음블로그 "내사랑 연변" -
오전 9시10분경, 왕청현의 변두리 마을에서 잠시 정차를 한다.

왕청현 변두리 마을

화장실을 들리고 싶었던 것인데.. 이곳의 화장실 역시 열악하다. 냄새가 넘 진동하는..

화장실

버스가 정차하고 있는 길 옆에 한 음식점이 있다. 이곳도 조선족자치주이다 보니 간판에 한문과 한글을 병기하고 있다. 가만히 메뉴를 들여다보니.. 活魚, 溫面, 冷面, 맛데침불고기 등을 팔고 있다. 活魚라 함은 회를 말하는 것 같은데 싱싱한 물고기가 있을 듯 싶진 않다. 식당 옆에는 "마음드는 수리부"라 쓰여 있는 간판이 보인다. 카센타인 듯 싶은데 상호명이 마음에 든다. ^^

흥륭맛데침불고기와 마음드는 수리부

이후 버스는 목단강을 향하여 계속해서 북진한다. 철길 옆 깔끔한 마을을 지나고..

철길이 지나는 마을

목재소가 있는 마을도 지나고..

목재소가 있는 마을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는 마을도 지난다.

연립주택 마을

그러한 마을 이외의 들녘에는 옥수수 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옥수수 밭

이번 여행중 서로 친구 먹기로 한 택길과 동우. 그 기나긴 이동 중에 줄기차게 서로 기대어 잔다. 우정(?)이 돈독히 쌓였을 듯 싶다. *^^*

택길과 동우1 [촬영: 오성희님]

택길과 동우2 [촬영: 오성희님]

오전 10시10분경, 어느 나무울타리가 있는 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나무 울타리 [촬영: 이승학]

공연히 나무 울타리 안을 들여다보니 그 집 뜨락에는 갖가지 꽃과 채소가 그득히 자라고 있다. 부지런한 사람이 살고 있는 가보다.

나무울타리집 앞의 친구들 [촬영: 이승학]

이후 아름다운 시골마을을 지나고..

시골 마을

오전 11시20분경 201번 국도에 들어선다. 첫날 목단강에서 이도백하로 갈 때 지나가던 국도에 다시 들어선 것이다. 오전 11시55분경 녕안 톨게이트를 지나고.. 오후 12시05분경 드뎌 목단강시에 진입한다.

목단강시내 [촬영: 폰카]

이후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한 중국식당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다. 중국식 요리만 나왔지만 주현이 가져온 고추장과 본상이 준비해온 컵라면 덕에 그럭저럭 배를 채울 수 있었다. ^^

점심식사 [촬영: 폰카]

오후 12시30분, 공항으로 가기 전 가이드의 권유(?)에 동의(?)하여 중아상무성(中俄商貿城)에 들른다. 러시아 면세점으로서 쌍안경, 목걸이, 자수제품, 펜던트 등 소품들을 팔고 있는데, 어느 펜던트가 맘에 들기에 하나 살까 하다가 그다지 싼 편이 아니기에 그냥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친구들이 한결같이 바로 그 펜던트를 사들고 나온다. 재홍이 가격을 후려쳐서 흥정한 덕에 다른 친구들도 덩달아 싼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고 한다. ^^

중아상무성(中俄商貿城) [촬영: 폰카]

o 목단강공항 → 인천 오후 2시경, 목단강 비행장에 도착한다.

목단강 공항

출국 수속을 마친 후..

출국수속 [촬영: 이환우]

오후 3시20분경, 목단강발 수흘행(서울행) 중국남방항공 비행기에 탑승한다.

목단강발 서울행 중국남방항공 비행기 [촬영: 폰카]

☆ 지나온 길 궤적 8. 연길-왕청-목단강 [거리: 282km, 소요시간: 5시간15분] 궤적 9. 목단강-인천(비행기) [거리: 1,349km, 소요시간: 5시간00분]

궤적8 - 연길/목단강

궤적9- 목단강/인천

☆ 쫑

백두산과 천지 - 동호 조남명作

백두산에 올라 천지(天池)를 보았다. 넓고 고요하였다. 천지를 둘러싼 외륜 16봉은 한결같이 장엄하였다. 민족의 얼과 혼이 서려있는 그곳. 가슴이 벅차올랐다. 북간도 벌판을 가로지르며 일송정을 우러러보았다. 해란강은 아픈 사연을 간직한 채 유구히 흐르고 있었다. 선구자의 자취가 남아 있는 그곳. 마음이 숙연해졌다. 대전고 59회 동기동창. 모두들 자랑스런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과 함께 한 3박4일간의 백두산 여정이 즐거웠다. 오랫도록 잊지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대전고59회 졸업 30주년기념 백두산등정 기념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