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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 절두산 박물관"
절두산 표석
김대건신부 동상
o 날짜: 2010.1.1(금)
o 날씨: 맑음 -12.7℃~-3.6℃ (서울)
o 장소: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96-1
I. Intro..
2010년1월1일. 신정. 아들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간다.
이제 그에게는 가군 실기시험(6일)을 시작으로 나군(13일)과 다군(20일)의 시험이 줄줄이 다가오고 있다.
막바지 고비에 선 아들에게 힘 좀 내라고 고기라도 사 먹이고 싶은 마음에 올라가는 것이다.
아침 8시30분, 대전서 출발하여 공주를 경유하여 서울 마포구에 도착한 시각이 10시30분.
아들에게 전화하니 그 시간까지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학원에서 신정연휴임을 배려하여 오전엔 휴강이라고 한다.
모처럼 늘어지게 자고 싶을 테니 점심식사 전까지 계속 자도록 하고, 1시간의 여유시간을 갖고 그 동안 가고 싶었던 곳을 찾아간다.
그 동안 아들이 기거하는 고시원을 오가다가 발견한 한 언덕.
강변북로에 인접하고 있는데 심상치 않아 보이기에 눈여겨 보아둔 뒤 나중에 정체를 조사해보다
그곳이 바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천주교 박해지인 절두산(切頭山)임을 알게되었고, 한번 가봐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던 것이다.
절두산 성당
네비에 "절두산"을 입력한 뒤 찾아간다.
Skyview 지도 - 절두산 위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프랑스의 병인양요(1866년).
그 희생양으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살되었다. 당시 무려 1만명의 신자들의 목이 잘려나간 곳이 바로 이곳 절두산이다.
순교 100주년째인 1966년 이곳에 순교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순교정신을 현향하였다고 한다.
절두산 순교성지 안내
절두산(切頭山) 순교성지(소재지 : 서울 마포구)
조선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두산은
양화진(揚花津)을 끼고 한강으로 돌출한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의 머리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한 데서 잠두봉(蠶頭峰)·용두봉(龍頭峰)·가을두(加乙頭)라고도 불렀다.
『실록』에도 세종 때 이곳이 가을두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원래 우리말의 들머리 즉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잠두봉은 양화진의 동쪽 언덕에 있었는데도 이 양화진 나루터에는 한강을 통해서
각 지방에서 조세곡 수송선과 어물,채소 등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배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었고,
또한 양화진 주변은 잠두봉과 어울려 이름난 승경으로
많은 풍류객과 문인들이 뱃놀이를 즐기면서 시를 짓거나
중국 사신들이 오면 빼놓지 않고 다녀갔을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이었다.
절두산(切頭山)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1866년(고종 3) 병인박해로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하였는데,
당시 조선은 신앙의 자유는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입국한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자들은 교통과 군사의 주요한 땅인 양화진이 서양의 세력에 의해 더렵혀진 것이
천주교인들 때문이니 천주교인들의 피로써 오욕을 씻고자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움과 동시에
1만여 명의 가톨릭(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처형한 데서 연유한다.
1866년 10월 22일 황해도 사람으로 시흥 봉천동에서 잡혀온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아내 김엇분(마리아),
아들 붕익(바오로)이 최초의 순교자라고 한다.
한국가톨릭교에서는 순교 100주년째인 1966년, 이곳에 순교기념관을 건립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순교정신을 현양하였다. 기념관은 순교자기념성당, 박물관,
순교성인 28위의 유해를 안치한 경당(經堂: 지하묘소) 등 셋으로 구분되어 있다.
순교자 기념공원으로 꾸민 앞마당에는 김대건(金大建)·남종삼(南鍾三)의 동상,
순교자상, 일본에서 순교한 오타줄리아의 묘 등이 있다.
- 출처: 절두산 순교성지 홈페이지(http://www.jeoldus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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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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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절두산 순교성지
오전 10시40분, 절두산 순교성지에 들어선다.
안내도
교육관 앞에 차를 주차한 뒤 안쪽으로 가려다가 맞은편 화단에서 조각상을 발견한다. 조각상 이름은 '팔마를 든 예수상'이다.
여기서 '팔마(Palm of Victory)'는 죽음으로써 믿음을 증언한 순교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팔마를 든 예수상
조금 더 들어가니 박물관 별관건물이 나온다.
박물관 별관
별관 입구 양쪽에 형구돌과 노기남대주교 금경축 기념비가 있다.
형구돌(形具石)은 병인박해(1866) 때 승선대원군의 지시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고안된 형구로서
앞 구멍에 머리를 대고 목에 밧줄을 건 뒤 뒷구멍에서 잡아당겨 질식시키는 교수형 집행 기구라고 한다. 잔인하단 말 밖에..
노기남대주교(盧基南, 바오로, 1902~1984)는 최초의 한국인 주교이자 제10대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분이다.
연자매 형태의 금경축(金慶祝)은 대주교의 사제 수품 50주년(1980.10.26) 기념비로서
대주교께서 교구장직을 은퇴한 후 머물던 합정동 자택에 세워져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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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구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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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남 대주교 금경축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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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관 앞 정원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문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나라에 84년과 89년 두 차례에 걸처 방문하였는데 이 기념비는 첫번째 방문 때 세워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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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문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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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 방문기념비 -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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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틴어: Ioannes Paul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ovanni Paolo II)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64대 로마 교황(재위: 1978.10.16~2005.4.2)으로 본명은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이다.
그는 하드리아노 6세 이래 455년 만의 비(非) 이탈리아 출신 교황이자 역사상 최초의 슬라브계 교황이다.
동시에 20세기 교황들 가운데 최연소로 즉위한 교황이기도 하다. 또한, 27년 가까이 재임한 그는
34년 동안 재임한 성 베드로와 31년 동안 재임한 비오 9세에 이어 사상 세 번째로 오래 재임한 교황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재임 동안 선진국에서는 가톨릭교회의 교세가 점차 기울어간 반면 제3세계에서는 확장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치세 전반에 걸쳐 여행을 가장 많이 한 교황으로 전임자들보다 100개 이상의 나라를 더 방문하였다.
그는 역사상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세계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모국어인 폴란드어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 크로아티아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라틴어 등
다양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도 알았다.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였고, 세계 평화와 반전을 호소하였으며,
생명윤리 등의 분야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도덕관을 제시하는 등 종교의 범위를 넘어 세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종교 간의 문제에는 시종일관 온건한 태도로 일관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 출처: 위키백과(http://www.jeoldus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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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대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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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관건물을 지나면 박물관 본관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로 가는 길 모퉁이에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천주를 섬긴다는 이유로 이 땅에서 약 100년간에 걸쳐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의 신앙을 공경하기 위해 세운 기념상으로서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가족 순교자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이쁜(마리아), 아들 붕익(鵬翼, 베드로)을 형상화 하였으며,
197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최종태교수(崔鐘泰, 요셉)의 작품이라 한다.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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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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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건물쪽으로 올라가니 절두산 표석이 나온다.
절두산 표석
그 왼편에 박물관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박물관 계단
ㄱ자형태로 맞붙어 있는 두 건물 위에는 굴뚝 모양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 십자가가 걸려 있다.
성당 십자가
두 건물 중 왼편이 박물관이다.
박물관 출입구는 굳게 닫혀 있다. 내부 수리 관계상 출입을 금한다고 한다.
출입구 양쪽 옆에 팔마와 순교자의 모후가 걸려있다.
박물관 입구
정면에 있는 건물이 성당건물인 모양이다.
성당
오른편 공터에는 미니어쳐 전시관이 있다.
미니어쳐 전시관
전시관 안을 들여다 보니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부활까지의 삶이 미니어쳐로 형상화 해놓았다.
우선 아기 예수가 태어난 말구유가 눈에 띄고..
말구유 - 예수님의 탄생
그리스도가 열두 제자와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최후의 만찬" 장면도 보인다.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신약성서 요한 복음 제13장 22절부터 30절에 이르는 내용을 비주얼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예수가 제자 중 한 명에게 배신 당하기 전날 밤, 열두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하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를 추모하기 위해 어떻게 먹고 마셔야 하는가에 대해 얘기해 준 뒤, 해 뜨기전에 이 중 한명이 나를 배신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순간 열두 제자가 제 각각 반응하는 충격, 분노, 두려움을 묘사한 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인 것이다.
최후의 만찬
왼쪽 첫번째 그룹은 바르톨로메오(Bartholomew), 작은 야고보(James Minor), 안드레아(Andrew). 안드레아는 두 손을 올리면서 그만두라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둘째 그룹은 유다(Judas), 베드로(Peter), 요한(John). 유다는 작은가방을 움켜쥐고 있고, 베드로는 화가나 있으며, 예쁘장한 요한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다.
세번째 그룹은 도마(Thomas), 큰 야고보(James Major), 빌립(Philip). 도마는 흥분해 있고, 큰 야고보는 대경 실색하고, 빌립은 예수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네번째 그룹은 마태오(Matthew), 다데오(Thaddeus), 시몬(Simon). 시몬이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다빈치가 가롯 유다를 그리기 위해 모델로 삼은 인물이 예수의 모델과 동일인이라는 흥미롭고 놀라운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 사람의 몸 속에 지고지순한 선(善)과 교활하고 야비한 악(惡)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벽화 - "최후의 만찬"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93년에 시작하여 1497년에 완성한 작품으로서
밀라노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 수도원의 식당 벽화로서 그려진 것이다.
화면 전체의 손상이 심해서 레오나르도 자신의 필치는 20% 내지 30%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구도, 공간 처리, 각 인물의 배치, 색채 같은 것에서 레오나르도의 흔적이 역력하다.
- 출처: 사무라이님의 "최후의 만찬" (http://blog.naver.com/samuraisdw/)
예수와 가롯유다의 모델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하여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와 12 제자들의 성격과 활동을 면밀히 연구하여 그들의 모든 것을 그림 속에 집약시켜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유독 예수와 가롯 유다의 모습은 참으로 표현하기가 난감하였다.
다른 사람은 다 그려 넣고 이 두 사람을 그릴 모델을 찾기에 고심하던 중
밀라노의 한 성당 성가대에서 환하면서도 엄숙하고, 거룩하면서도 따사롭고,
고결하면서도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찬양하고 있는 한 청년을 보았다.
다빈치는 그 자리에서 그 청년을 모델로 예수의 모습을 그려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작품을 시작한지 2년이 넘게 흘렀으나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지 못하여 그림은 아직 미완성이었다.
그러던 어느 어스름한 저녁 다빈치는 한 청년을 보았다. 그는 추하고, 더러웠으며 쥐 눈알 같이 교활하고 야비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다빈치는 그 청년에게서 가롯 유다의 모습이 보이기에 그 청년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청년은 많은 돈을 요구하였다. 다빈치는 두 말 않고 청년의 요구대로 돈을 건네주고 청년을 모델로 가롯 유다를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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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 수도원의 식당벽화 - 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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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는 며칠 동안 청년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묘한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그 느낌이란 가롯 유다의 모델로 삼은 이 청년은 자신이 예수의 모델로 삼았던 그 청년과 어딘가 매우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가롯 유다의 모습을 다 그려 넣어 저 위대한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완성한 후,
다빈치는 청년에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 혹시, 자네 2년 전 밀라노 성당 성가대에서 찬양한 적이 없는가?"
그 청년은 매우 당혹스러워 하면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하였다.
예수와 가롯 유다의 모델은 같은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출처: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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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조형물 뒷편에 골고다 언덕이 있다.
골고다 언덕
그 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로마 병사들이 보인다.
예수의 십자가형
박물관 건물에서 내려와 광장 옆을 지나 한강변쪽으로 간다.
그 중간 우측편으로 성모동굴이 보인다.
동굴
성모동굴은 1858년 성모님이 프랑스 루르드 동굴(마사비엘)에서 발현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것을 본 딴 동굴이다.
절두산의 성모동굴은 1978년에 만들어졌다 한다.
성모동굴
그 아랫쪽에 촛불관이 있다.
촛불관
그 안에 많은 촛불들이 켜져 있다. 초를 담은 유리잔에는 신도 또는 신도 지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적혀 있는 사람에 대해 소원하는 바를 빌며 촛불을 켜 놓은 것이다.
촛불
촛불관 뒷편은 절두산 언덕이다. 위에 둥그런 건물은 성당인 듯 싶다.
절두산 언덕
절두산 바로 앞에 한강이 흘러간다.
옛날 이 부근에 양화나루가 있었고 그 동쪽의 절두산 언덕을 누에모양이라 하여 잠두봉이라 했는데, 경치가 워낙 좋아 많은 풍류객들이 오가곤 했었다고 한다.
양화나루라는 이름은 인근 강변에 갯버들(양화)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가 이곳까지 진출하였는데,
대원군이 서양오랑캐 때문에 나라가 더러워졌고 그 더러움을 씻으려면 천주교도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당시의 천주교도 만명 가량을 포박하여 이곳에서 목을 베어버렸다고 한다. 당시에 세운 척화비도 이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한강변
한강변에는 강변북로가 지나고 그 너머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왼편 건물 뒷편에 보이는 산은 관악산인 듯 싶다.
강변북로와 국회의사당
강변 우측에는 당산철교가 한강을 가르고 있다.
강변북로와 지하철2호선(당산철교)
하늘에는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나르고 있다.
새 - 삼각편대
아직까지 남으로 떠나지 않은 것을 보니 텃새인 모양이다.
삼각편대를 이루던 그네들이 수평편대로 대오을 바꿔서 어디론가 날아간다.
새 - 수평편대
조금 있으니 성당 미사가 끝났는지 신도들이 몰려온다.
그중 일부는 성모동굴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다른 일부는 촛불관에서 촛불 기도를 올린다.
기도
촛불관 맞은편 강변쪽엔 석탑, 비석, 조각상 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석탑, 척화비
석탑 옆에 있는 비석 앞으로 가니 비문이 눈에 익은 내용이다. 바로 그 척화비(斥和碑)다.
척화비(斥和碑)는 1871년(고정 8) 흥선대원군(1820~1898)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함.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움.
척화비
그 옆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신부(1821~1846)의 좌상이 세워져 있다.
25세에 순교하였으니 한창 젊은 나이의 모습이다.
김대건신부 좌상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김대건신부 좌상, 척화비, 촛불관이 차례로 보이고
절두산 뒷편으로 당산철교가 보이고 그 너머로 양화대교가 얼핏 보인다.
척화비 길
척화비 길이 끝나는 부근부터 조성되어 있는 "십자가의길"에 들어선다.
이 길은 그리스도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는 과정과 부활에 이르는 열 다섯 장면을 묵상하는 곳이다.
각 처에는 이곳에서 순교한 신앙의 선조들이 바쳤던 옛 기도문 '셩노션공'의 머리부분과 현재 교회에서 통용되는 기도문의 첫 부분을 함께 새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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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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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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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제1처, 제2처
제3처.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제3처, 제4처
제5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짐을 묵상합시다.
제6처.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합시다.
제5처, 제6처
제7처. 기력이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8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7처, 제8처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제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을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제9처, 제10처
제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목 박히심을 묵상합시다.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제11처, 제12처
제13처.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합시다.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합시다.
제13처, 제14처
제15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제12처에서 목격한 한 노신도의 모습.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한 없이 애달파하고 계신다.
제15처, 제12처
십자가의 길 끝에 "영광의 물기둥"이라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1973년 서울대 이순석교수(李順石, 바오로)가 제작 했으며 강화도 근처 바닷속에서 수집한 자연석에 직접 글을 새긴 것이라 한다.
검은 돌기둥 앞면에는 '영광'. 뒷면에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와 '주는 찬미를 받으소서'라는 기도문을 십자 모양으로 새겨 넣었다.
상단에 새겨진 가시관과 왕관은 고통과 죽음을 통해 이룬 순교자들의 영광을 상징한다고 한다.
맞은 편 길 모퉁이에 성모상(聖母像)이 있다.
이것은 1984년에 서울대 최종태교수(崔鐘泰, 요셉)가 제작했으며, 2001년 이전에는 성지 내 성모동굴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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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물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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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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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한켠에 또 하나의 성모상이 있다.
한 신도가 성모님의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드리고 있고, 그 주변에 다른 신도들이 서성이고 있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성모상
성모상 뒷편으로 가면 박순집과 남종삼 공적비가 세워진 광장이 나온다.
두 분은 조선 말엽 극심한 천주교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천주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분들이라고 한다.
박순집 & 남종삼 광장
박순집 & 남종삼 안내
광장 왼편에 박순집(朴順集, 베드로, 1830~1911)의 묘비와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박순집은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이다.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범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자기 문중 산인 관악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바오로는 10월 17일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을 이어 부친 일가족 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고개에 안장하는 등 순교자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중앙성당이 세워져 있다.
박순갑 묘비 및 공적비
광장 한 가운데에 성 남종삼(南鐘三, 요한, 1817~1866)의 흉상과 순교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는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진사에 급제하여, 현풍현감, 충청 목사를 역임하고 퇴관 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남종삼은 남상교의 아들로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영향 아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해 승지까지 이르렀다.
지속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프랑스인 성직자를 통해 막아보려 하였으나 대원군이 급선회함에 따라
병인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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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남종삼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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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남종삼 순교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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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우측에 은언군과 해운당대사 의징의 비가 세워져 있다.
은언군(恩彦君, 1755~1801)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이지만 천주교 신자였던 모양이다.
신유박해 때 대역죄인으로 몰려 그의 부인 송마리아(?~1801)와 함께 사사(賜死)되었고, 철종 2년(1851년)에 사면되어 이 비가 세워졌다 한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해운당대사의 비가 눈길을 끈다.
대사(大師)라 함은 불교승려를 말하는 것 같은데 스님의 비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안내문에 따르면, 해운당대사 의징지비(海雲堂大師 義澄之碑)는 1962년 천진암 주어사 터(경기도 여주군 금사면의 한 논밭)에서 발견된 비로서
1689년 해운당 의징 스님의 상좌(上佐) 수견천심(守堅天心) 스님이 세운 것이라 한다. 그 비석을 1973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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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언군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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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당대사 의징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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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자료를 찾다보니 이 비석과 관련하여 문화재 관리에 관한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는 모양이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의징스님 비와 같은 발견문화재의 경우 일주일 내에 관계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그런데, 가톨릭 측은 비가 발견된 논 주인이 기증했으므로 이 비가 자신들에게 소유권이 있다 하며 신고도 없이 옮긴 것이다.
문화재 신고의무를 저버린 것도 그러려니와 타 종교의 유물을 맘대로 옮겨놓아 가톨릭 성인들의 비석과 흉상에 둘러싸이도록 한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해운당 의징은 조선 고승 반열에 오른 사람이 아닌 듯 하다고 한다.
해운(海雲)이라는 이름은 '화엄경' 입경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두 번째로 찾아간 스승인데 그는 인도양을 하루 내내 관(觀)하는 재야의 도인이다.
그 해운비구의 이름을 법호를 삼은 것이다. 아마도 주어사에서 정진하던 선승인 듯 싶은데 그의 비석이 하루 빨리 원래 있던 절터로 되돌려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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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빠져나와 박물관 맞은편의 큰 광장으로 간다.
광장 한 가운데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동상 광장
이 동상은 성 김대건 신부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기념 제작된 것으로
과학적으로 실측 조사한 수치를 면밀히 고증하여 실물에 가장 근접하게 완성하여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고 한다.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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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신부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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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동상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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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金大建, 김안드레아, 1821.8.21~1846.9.16)
김대건은 1821년(순조 21년) 충청남도 솔뫼에서 김제준(이냐시오)ㆍ고 우르술라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재복(再福). 김대건은 1827년 정해박해로 경기도 용인 골배마실로 피신할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신앙심 깊고 총명했던 김대건은 1836년 4월 부활절 무렵
골배마실 근처에 있는 은이공소를 방문한 모방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됐다.
김대건은 앞서 신학생 후보로 선발된 최양업ㆍ최방제와 함께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1837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도착했다.
국내에서는 박해 때문에 신학 공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대건이 신학생으로 부름받은 데는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집안 내력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증조부 김진후(비오)는 10여 년 옥고를 치른 끝에 순교했고, 조부 김택현은 신앙을 지키고자 고향을 떠나 낯선 산골
골배마실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결단을 내렸다.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순교한 부친 김제준은 1984년 김대건과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이밖에도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김대건 집안은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이처럼 뿌리 깊은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난 김대건이 기꺼이 성소를 받아들이고
모방 신부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김대건은 최양업ㆍ최방제와 마카오 신학교에서 6년간 사제양성 과정을 밟았다.
안타깝게도 최방제는 1838년 마카오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842년 최양업과 함께 중국 요동땅
소팔가자(小八家子)로 옮겨 학업을 이어간 김대건은 1844년 12월 이곳에서 부제품을 받았다.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고향을 떠난 지 8년 만인 1845년 1월 평북 의주를 거쳐 국내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 선교사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김대건은 중국에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교구 제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셔오고자 배 한 척을 사서 그해 4월 30일 중국 상해로 출발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교회 첫 번째 사제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귀국길에 오른 김대건은 폭풍을 만나 제주도 인근에서
표류했다가 1845년 10월 12일 전북 나바위에 무사히 상륙한 뒤 서울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5월 서해 바다길을 통한 선교사 영입 방법을 찾아보라는 주교 지시에 따라 서해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에 편지와 지도를 건낸 김대건은 6월 5일 백령도 인근에서 체포됐다.
김대건의 사목활동은 아쉽게도 반년 만에 멈춰야 했다.
포도청에서 엄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대건은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했다. 불과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였다. 모래사장에
가매장됐던 그의 시신은 경기도 미리내와 용산 성직자 묘지를 거쳐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에 안치됐다.
- 출처: "영원에서 영원으로" - 금낭화님 (http://cafe.daum.net/0one0one/1IVA/1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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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신부 (사진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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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가 바라보는 곳에 박물관 본관이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 본관
관람을 마치고 차를 주차해놓은 교육관 앞으로 간다.
맞은편에 지하철 2호선이 지나고 있고, 전철 방음벽에는 성화가 그려져 있다.
지하철2호선 외벽의 성화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다가 정규 주차장으로 간다.
그곳에 있는 "절두산 순교 기념탑"를 들르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주차장 뒷편의 절두산 성당과 순교탑
순교자 기념탑은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이의송 가족을 비롯한
28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2000년 9월20일 세워졌다 한다.
순교 기념탑
가운데 있는 주탑에는 형틀을 상징하는 조형물 아래 16명의 순교자들 모습을 새겨 놓았고,
우측 탑에는 절두된 머리가 올려져 있고 그 아래 33명의 순교자 모습이 새겨져 있다.
좌측탑은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절두산에서 순교한 무영 순교자들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순교 기념탑
순교자의 면면을 보니 모진 박해를 받았을 터인데도 표정들은 한결같이 온화해 보인다. 신앙의 힘이리라..
주탑 - 16명의 순교자
III. 아들
11시40분경, 아들이 있는 고시원으로 온다.
밖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아들이 학원갈 채비를 한 뒤 밖으로 나온다.
고시원
한 달만에 다시 보는 얼굴.
초최하고 핼쓱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안스러움이 인다.
슬찬 1
인근 식당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먹은 뒤 다시 헤어지는 시간..
녀석이 엄지손을 치켜들은 뒤 학원으로 향한다. "화이팅!"하겠다는 표현이리라.. 그래 "화이팅!"이다.
슬찬 2
IV. 쫑
아들이 조금 더 힘을 내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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