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재 산책 - 마의태자의 한(恨)"
하늘재
o 날씨: 맑음 -4.8℃~2.1℃ (경북 문경)
o 행적: 하늘재→미륵리사지→하늘재
o 거리: 왕복 약 7km
I. Intro..
서기 935년 10월.
신라 경순왕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도모하여 땅을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려 할 때, 왕의 자 태자가 말한다.
"국가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달려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다음에야 그만둘지언정,
어찌하여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하게 남에게 넘겨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경순왕 답하기를..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그 형세가 더 이상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성하지 못한 터에 겸허하지도 못해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간과 뇌가 땅에 나뒹굴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왕은 곧이어 시랑 김봉휴로 하여금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태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부르게 되었다.
- 참조: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마의태자가 덕주공주와 함께 개골산으로 향하던 중, 문경 어느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는 데 꿈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이
'서쪽 고개를 넘어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절을 지으면 억조창생에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일러준 뒤
사라졌다고 한다. 꿈을 깬 마의태자가 덕주공주와 상의하니 공주도 똑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매는 '하늘재'를 넘어와 마의태자는 미륵석불입상을, 덕주공주는 월악산 마애미륵불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 참조: 구전 설화
영화 속의 마의태자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넘어갔다는 하늘재.
그 고개를 찾아간다.
하늘재
경북 문경 문경읍 관음리와 충북 충주 수안보면 미륵리를 잇는 해발 525m의 하늘재.
2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간직한 고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로 알려진 하늘재가 닦인 것은 서기 156년.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 이사금 3년(156년)에 계립령 길(하늘재의 옛 이름)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늘재 약도
하늘재 아래에 있는 충북 충주 미륵리는
신라 말과 고려 초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미륵대원(彌勒大院)이란 석굴사원이 자리했던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절을 세운 사람은 신라의 마의태자이다. 신라의 국운이 기운 후
금강산으로 향하던 마의태자는 하늘재를 넘어 이곳에 머물며 절을 짓고 미륵불상을 세웠다
하늘재엔 평강공주와 부부의 연을 맺은 온달 장군과 얽힌 전설도 있다.
신라가 이 고개를 통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자 온달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을 차지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며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 발췌: "하늘재 - 인생을 닮은 하늘재가 좋다", 매일신문/이대현기자
-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II. 이동
오전 10시49분, 중부내륙고속국도(45번)의 점촌함창 IC를 지나니 전방에 주흘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주흘산의 세 봉우리 중 관봉(고깔봉)과 주봉만 보이고 영봉은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눈으로 채색된 산줄기가 문경의 진산답게 기골차고 장대하다.
주흘산 원경
올해 초 3월 홀로 저 산을 종주한 바 있다.
틀목고개로부터 시작하여 주흘산 관봉(1,089m), 주봉(1,075m), 영봉(1,106m)을 지나 부봉의 여섯 봉우리까지 넘어선 뒤 하산하였다.
당시 부봉 자락으로 들어서던 중 나뭇가지 너머로 보이던 포암산과 포암산 아랫자락으로 지나는 하늘재를 내려다보며
잠시 1,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비운의 왕자와 공주가 느꼈을 법한 상심을 더듬던 것이 생각난다.
언젠가 그곳을 거닐어 보리라 하면서.. 오늘 바로 그곳에 가는 것이다.
주흘산 전경
곧이어 조령산(1,025m)도 시야에 들어온다.
조령산 원경
조령산은 재작년 9월 대한토와 함께 갔다 온 산이다.
조령산 정상 이후의 가파른 암능. 그 암능길에서 끝없이 밧줄을 타고 넘어갔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만치 암릉미도 무척 뛰어났던 산이었던 것 같다.
조령산 전경
문경새재IC를 빠져나와 문경읍내를 통과하여 901번 지방도를 타고 하늘재 길목인 관음리로 향한다.
도로 우측에는 운달산 성주봉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 산도 역시 대한토와 함께 지난해 12월 종주를 했었던 산이다.
당시 종지봉에서 시작하여 성주봉을 지나 운달산 정상을 넘어 금룡사로 하산했었다.
종지봉의 가파른 바위 슬로프를 힘겹게 타고 오르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운달산 종지봉과 성주봉
운달산 뒷편으로 대미산이 보인다.
대미산
대미산(大美山, 1,115m).
원래는 대미산(黛眉山)이라 하여 '검푸른 눈썹의 산'이란 뜻으로 풀이되었는데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계실 때 한자를 달리해서 대미산(大美山)이란 애칭을 붙여줬다고 한다.
등산 애호가였던 퇴계선생에게 무척 아름답게 보였던 모양이다.
한편, 조선 영정조시대에 발간된 문경현지에 따르면 대미산이 문경에 있는 모든 산의 근본이 되는 산이라고 한다.
이 산으로부터 문경구간의 백두대간이 시작되고, 아울러 이 산이 문경에서 가장 높기 때문이다.
구글지도 - 하늘재 주변의 산과 마을
5분 가량 더 전진하니..
대미산에서 서쪽으로 고만고만한 높이로 뻗어가던 백두대간이 험악한 기운이 감도는 봉우리 하나를 솟아놓았다.
바로 포암산이다. 백두대간은 저곳으로부터 남쪽으로 꺾어돌아 월함삼봉을 거쳐 마폐봉, 조령산으로 맥을 이어간다.
포암산
오전 11시11분, 갈평삼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오전 11시13분, 항정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한다.
갈평삼거리
항정삼거리
이제 하늘재 길목인 관음리에 접어든 것이다.
관음리
오전 11시16분, 길 우측편에 관음리 석불입상 표지판이 보인다.
관음리 석불입상 표지판
화살표가 가르키는 방향을 바라보면 밭뚝 너머로 전각이 하나 보인다.
석불입상 전각
예전 자료에 의하면,
관음사터인 저 부근 당나무 숲과 산모롱이에 석불입상과 석조반가사유상이 방치되고 있어
문화재를 아끼는 분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전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두 석조물을 적절히 보전하도록 조치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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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하늘재의 문화경관을 위하여" ⓒ 경향신문 & 미디어칸) |
아무튼, 저곳에 관음사가 있었다면 그 석불은 관음불이 아닐까?
마의태자가 이 부근에서 하룻밤을 잘 때 꿈에 나타나서
서쪽 재(하늘재)를 넘어가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모신 뒤
억조창생에 자비를 베풀라고 하셨다는 그 관음불이 아닐까?
그런데 관음불께서는 왜 미륵불을 세우라 했을까?
현세의 중생에게 소원을 들어주시는 관음불과 미래에 나타나 중생을 구원해준다는 미륵불.
이미 현재의 신라는 국운이 쇠하였으니 미래를 바라보며 억조창생에게 덕을 쌓으란 말일까?
..
당장 밭뚝을 건너 관음불을 뵙고 싶지만..
시간관계상 지금은 일단 하늘재를 넘어가 미륵불을 뵙고 난 뒤
다시 이곳으로 넘어올 때 들러보기로 한다.
조금 더 전진하다 보니 도요지가 속속 눈에 띈다.
지리적으로 볼 때 하늘재를 넘어가 미륵지를 지나면 월악산자락을 적시고 있는 충주호가 나오는데
그 물이 한강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들은 대부분 한양 땅으로 공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일대에 도요지가 많다는 것이다.
조선요(朝鮮窯)
조금 더 오르니 사과창고가 있다.
그러고 보면 지나오면서 죽 보아오던 과수원의 나무들이 모두 사과나무이었던 것 같다.
달고 새콤새콤하여 문경에서 '꿀사과'라 치켜세우며 자랑하는 문경사과가 이곳 일대에서도 재배되는 모양이다.
사과 창고
이제 점차 포암산이 가까이 다가온다.
포암산
오전 11시27분, 포암사 입구를 지난다.
예전 주흘산에서 부봉으로 넘어갈 때 내려다 보이던 절터 같은 곳이 여기인 모양이다.
포암사 입구에는 명상센타라 쓰여있는 돌비석이 누워있고 그 뒷편 진입로에 돌탑이 죽 늘어서 있다.
사람 손으로 세웠을 텐데 정성이 꽤나 들어갔을 것 같다.
포암산과 포암사 입구
포암산(961.8m)은 계립령(하늘재)를 사이에 두고 탄항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으로서 베바우산, 비바우산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 이름들은 절벽을 이루고 있는 높고 넓은 암벽에 수직방향으로 그어진 문양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큰 삼베를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비가 내리는 것 같다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하늘재의 옛날 이름은 계립령이었다고 한다.
계립령은 껍질을 벗겨 놓은 삼의 줄기인 삼대 즉 '겨릅'이 '계립'이 소리옮김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하늘재의 옛 이름인 계립령도 저 절벽바위의 문양 때문에 지어진 이름인 것이다.
그나저나 승용차가 점점 수상쩍다.
도로를 살짝 덮은 눈이 얼어붙었는지 조금씩 미끄럽다 싶더니 급기야 전진을 하지 못한다.
하늘재 정상은 이제 1km 가량 남은 듯 싶은데..
몇 차례 후진을 했다가 다시 전진을 해보려고 해도 헛바퀴만 돌고 있다.
할 수 없이 조심스럽게 후진하여 삼거리 모퉁이에 주차를 한 뒤 하차한다.
주차
III. 하늘재 산책
오전 11시43분, 배낭을 트렁크에서 꺼내어 메고 하늘재를 향하여 걸어간다.
하늘재로 향하는 길
여기서 하늘재 마루까지는 1km 가량 되고, 이후 미륵리사지까지는 3.2km 가량 더 가야 한다.
되돌아서서 차를 몰고 문경을 빠져나가 연풍을 지나 수안보를 거쳐 미륵리로 가는 방법이 있지만,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넘어갔다는 관음리로부터 미륵리까지의 하늘재 길을 걸어가며
그들이 품었을 법한 망국의 한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하늘재 마루를 향해 걷던 중 만난 외딴집.
인근 농장을 가꾸며 살고 살기 위한 거처인 듯 싶은데 지금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도 불구하고 지붕위로 솟은 연통에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외딴집
그 즈음 오던 길을 되돌아 보니 여우목 고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소백산으로부터 맥을 이어온 백두대간이 대미산을 솟아놓은 뒤
서쪽으로 맥을 이어가는 한편 남쪽으로 운달지맥을 가지친다.
운달지맥은 여우목재와 마전령을 지나 운달산을 솟아놓은 뒤
조항령, 단산, 천마산을 거쳐 낙동강까지 이르는 거리 48.1km인 지맥이다.
여우목고개
다시 하늘재를 향하여 걸어간다.
하늘재 가는 길
5분 가량 올라가니 하늘재 마루가 가까이 다가온다.
하늘재
하늘재 위의 하늘이 참 맑고 푸르다.
하늘재
오전 11시55분, 하늘재 마루에 올라선다.
계립령 유허비
하늘재 마루에는 계립령 유허비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계립령은 '하늘재'의 옛말인데,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왕 때 개척하여
소백산 들머리인 죽령 보다도 2년 먼저 열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라 한다.
지리적으로 이 고개를 넘으면 손쉽게 한강에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북진과 남진의 통로가 되어 역사적으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던 곳이며
온달장군, 마의태자, 궁예, 공민왕 등과 같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갖가지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계립령 유허비 비문
고개마루 왼편에는 꽤 높은 축대가 있고 그 위에 또 다른 비석이 세워져 있다.
카메라를 Zoom-Up 하여 확인하니 비석에 백두대간이라 쓰여있는 것 같다.
대미산에서 서쪽으로 뻗어온 백두대간은 포암산에서 남쪽으로 꺾어져
이곳 하늘재를 지나 주흘산 부봉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곳이 바로 백두대간을 잇는 고개마루임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백두대간 비석
고개마루 서편 숲방향으로 관리소와 안내판이 서 있다.
하늘재공원 지킴터
안내판에는 하늘재 안내도가 걸려있다. 이곳으로부터 미륵리사지까지는 3.2km이다.
하늘재 안내도
그 옆에는 입산금지 안내문이 있다.
춘기(3.1~4.30)와 추기(11.15~12.15)에 산불예방을 위해 입산을 금지하고 있다.
아마 포암산이나 부봉으로 오르는 산행에 적용하는 내용일 듯 싶다.
미륵리사지까지의 산책길은 열어놓고 있다.
하늘재 공원지킴터
맞은 편 공원지킴터에는 '순찰중'이라 쓰여진 팻말이 내걸려 있다.
아까 삼거리에 차를 주차할 때 만났던 분이 이곳 지킴이인 모양이다.
오전 11시59분, 산책로에 들어선다.
이제 경북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에 들어서는 것이다.
경북에서 충북으로 넘어가는 것이며, 현세의 관음리에서 내세의 미륵리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접한 두 지역명도 참 절묘하게 지어진 것 같다. 관음리와 미륵리..
산책로와 포암산 입구
산책로는 도로가에 비하여 포근하고 숲 공기도 고요하다.
눈길
겨울바람이 울창한 숲속 깊은 곳까지 들이치지 못하고
빈 하늘만 휘젓고 다니는지 나무끝만이 살랑살랑 움직인다.
어디선가 외는 염불 소리가 나뭇가지 사이로 울려퍼진다.
숲 속의 염불소리. 예전 치악산을 오를 때 들었던 낭랑한 목탁소리가 생각난다.
숲 속의 염불과 목탁소리는 마음을 정갈하게 해주는 것 같다.
깨달음을 위한 정진이 고요함과 궁합이 맞기 때문이리라..
하늘과 바람과 염불소리
조금 내려가니 등로 우측 편으로 석축이 이어진다.
석축
하늘재에 얽힌 전설은 무척 많다.
신라말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향하던 중 이곳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로 내려갔다는 얘기 외에도
고구려 온달장군이 신라로부터 빼앗긴 죽령 서역을 되찾기 위해 이곳으로 군사를 이끌고 왔다는 얘기
고려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봉화 청량산으로 몽진하던 때 이곳을 지나갔다는 얘기
고려말기 몽고군이 충주산성을 무너뜨린 후 상주산성을 함락시킬 때 이곳을 경유했다는 얘기
조선시대 임진년 왜구들이 이곳을 통하여 침략을 발길을 북으로 들이닥치며 파괴와 살육을 하였다는 얘기 등이 전해진다.
또한 퇴계선생께서 단양군수로 계실 때 금수산과 대미산의 이름을 지어줬다고 하는 것을 보면 선생께서도 이 고개를 수 없이 많이 넘나들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많은 전설들을 저 석축과 이끼는 기억하고 있을까?
석축
석축 이끼
하늘재. 오늘 나의 화두는 마의태자의 한(恨)이다.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은 크게 영접을 받아 호화로운 행차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일면을 볼 때 경순왕이야 말로 천년사직은 커녕
민초조차도 안중에 없이 자신의 영달만을 좇는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왕인 것 같다.
그렇다면 천년사직을 지켜야겠다며 떠돌기 시작한 마의태자는 정의로운 것인가?
미륵보살을 모시고선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하신 관음보살의 뜻을 팽게치고
저 아래 미륵리에서 미륵불과 여동생 덕주공주를 남겨둔 채 설악산으로 떠나버린 것은 무슨 뜻일까?
어느 자료에 따르면 마의태자가 개골산에서 삼베옷을 입고 일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라
설악산 인제 부근에서 세력을 키워가며 호시탐탐 거병할 날을 노렸다고 한다.
왕건에 무릎꿇은 부왕에 대한 생각.. 왕국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 홀로 남겨둔 여동생 생각..
그는 그런저런 오만가지 상념에 젖어 천년전 이 길을 걸었으리라..
길가의 풀, 나무, 벌레, 새, 자갈들이 그를 연민스런 눈으로 바라보았으리라..
하늘재 길
숲 어디에선가 새 한마리가 날아들어 폴짝 폴짝 움직인다.
이 즈음은 먹을 것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어찌 이 겨울을 넘겨내고 살아갈지 걱정스럽다.
잠시 곤석의 움직임을 쫓아 시선을 꽂는다.
새
다시 하늘재를 걷는다.
나뭇가지 사이로 울려퍼지는 염불소리가 이제 한층 더 낭랑하게 들려온다.
소나무와 하늘과 불경소리
길가에 고만고만한 높이의 돌탑들이 눈으로 뒤덮여 있다.
소망이 적지만 소중하다면 저 만치의 높이로도 만족할 수 있을텐데..
돌탑
오후 12시25분, 갈림길을 만난다. 옆에 세워진 이정표가 우측 샛길이 역사자연 관찰로임을 알려준다.
인적도 드문 오늘 같은 날 눈이 쌓인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과히 내키지 않기에 그냥 지나친다.
역사자연관찰로 갈림길
직진하여 계속해서 내려가다보니 전방에 묘한 형세의 산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박쥐봉
나중에 집에 돌아와 자료를 검토하다보니
저 봉우리가 북바위산의 한 봉우리인 박쥐봉(782m)임을 알게 된다.
봉우리 이름은 정상에 위치한 박쥐 형상의 바위 때문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예로부터 정상 부근 자연동굴에 박쥐떼가 많아 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박쥐봉
오후 12시34분, 또 다시 갈림길을 만난다. 우측편에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산책로로 접하고 있다.
이곳이 아까 갈려져간 역사자연 관찰로가 다시 만나는 곳인 모양이다.
산책로 갈림길
그곳으로부터 조금 더 내려가니 포장도로가 나오고, 그 입구에 솟대와 장승이 세워져있다.
솟대는 지역별로 오리, 까마귀, 기러기, 갈매기, 따오기, 까치 등
갖가지 새를 조각하여 놓는데 이것은 무슨 새인지 잘 모르겠다. 오린가?
옆에 있는 천하대장부와 지하여장부의 머리 모양도 이채롭다. 대장군 머리에 오리가 앉아 있는 것 같다.
솟대와 장승
솟대의 반대편 동쪽에 하늘재 비석이 세워져 있다.
미륵리쪽으로 볼 때에는 이곳이 하늘재 입구이기 때문에 이곳에 비석을 세워놓은 모양이다.
하늘재 비
하늘재 비 - 필자
비문
IV. 미륵리 사지
하늘재 입구 옆에 미륵대원터가 있다.
미륵대원터
자료에 따르면 이곳은 고려초기에 미륵리사지 옆에 조성된 역원터이자 절터로서
나그네 숙소, 관리인 숙소, 그리고 마방(馬房)의 흔적이 남아있고 '대원사(大院寺)'라 쓴 명문기와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국어학자들은 '하늘재'의 어원을 '대원'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즉 '대(大)'가 예로부터 '한'을 뜻하기 때문에 '대원'이 '한원'으로 대체되었고,
대원사 인근의 재도 '한원재'로 불리다가 발음이 전이되어 '하늘재'가 되었다는 얘기다.
미륵대원터 안내
미륵리대원터의 동편 밭둑 위에 삼층석탑이 있다.
이것은 고려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일반형의 석탑으로,
2중 기단 위에 3층의 탑몸돌 부분을 형성하고 그 위에 노반을 얹어 놓고 있다.
매우 안정감을 주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라시대 정형화된 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밭둑 위에 탑을 세운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는 설이 있다.
삼층석탑
탑신 기단 한켠에 자그마한 금불이 놓여있다.
누군가가 얹어놓고 간 모양인데 그 뜻이 쉽게 헤아려지지 않는다. 소중하게 간수하던 불상일텐데..
금불
삼층석탑이 마주하고 있는 봉우리는 박쥐봉이다.
흰눈이 희끗희끗 덮여 있지만 까탈스런 바위산의 험상궂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 고약한 기운을 삼층석탑이 지긋히 눌러주고 있는 것 같다.
삼층석탑과 박쥐봉
동쪽으로 조금 더 오르니 거대한 불두가 놓여 있다.
고려시대의 미완성 석불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목구비가 뚜렸한데 비해 입이 너무 작게 표현되어 있어 다소 우스꽝스럽다.
불두
오후 12시50분, 발걸음을 돌려 서쪽 미륵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미륵대원터 울타리 끝을 돌아서니 제법 너른 절터가 나오고 전방에 탑신이 보인다. 저곳이 미륵리 사지인 모양이다.
미륵리 사지
그 안으로 들어가던 중 왼편을 돌아보니 좀 전에 보았던 미륵대원터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온달장군이 신라에게 점령 당한 죽령 서역의 땅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와 진을 쳤었다는 얘기가 기억난다.
미륵대원터
다시 절터로 향하다가 오른편에 누워있는 석물들을 발견한다.
주변에 별도 안내문이 없지만 사전에 읽어본 자료에 따르면 당간지주로 쓰이던 석물인 것 같다.
당간지주
절터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다 보니 거북 모양의 석물이 있다.
이 돌거북은 1977년에 출토한 것인데 등에 있는 홈은 비신(碑身)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길이가 6.05m, 높이 1.8m, 너비가 4m에 달해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에서도 가장 큰 거북이라고 한다.
돌거북
최근의 자료에 따르면 등줄기선이 북극성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즉 거북 등줄기는 진북 방향, 홈은 정동과 정서 방향으로 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이 거북이 천문관측용 기구가 아닐까 하며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마의태자 꿈에 나타난 관음불이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곳에 미륵불을 세우라고 했다는 전설과 연관이 지어지기도 한다.
돌거북
거북의 얼굴에는 동그란 눈이 그려져 있다.
살짝 비틀어진 입과 동그란 눈이 잔잔히 웃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져 보는 이로 하여금 덩달아 웃게 만들고 있다.
또한 거북의 왼쪽 어깨 부근에는 자그마한 거북이 두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아마 석공도 이것을 새겨넣으며 웃음을 지었을 것 같다.
앙증맞은 새끼 거북을 보면서 1000년전 어느 석공의 장난끼 어린 숨결을 잠시 느껴본다.
돌거북 얼굴
돌거북 등
그 자리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삼층석탑, 석등, 미륵불이 일렬로 나란히 서있다.
오층석탑, 석등, 미륵불, 감실
역광을 피해 오른쪽으로 가서 사진을 찍으니 일자형 배치가 확연히 드러난다.
석실 중앙에 미륵불이 있고, 그 앞으로 석등과 오층석탑이 북쪽을 향하여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일자형 배치
오층석탑 왼편 일자배치에서 벗어난 곳에 나즈막한 석등이 하나 있다.
오층석탑과 미륵불 사이에 있는 석등 보다 작은 사각석등이다.
오층석탑과 사각석등
사각석등은..
사각의 받침돌(간주석)이 상대석을 받치고 있고, 상대석 위의 사각 옥개석을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에 각각 새겨진 연꽃 문양이 깔끔하며 서로 잘 어울린다.
사각석등
오층석탑 앞으로 다가선다.
오층석탑 (보물 제95호)
이 오층석탑은 보물 제95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유물로서
높이가 6m에 이르는데, 자연석을 다듬어 지대석과 기단부를 조성했으며,
기단부의 내부를 파내어 4면의 벽석을 만든 형태라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지붕돌의 너비가 몸돌에 비해 아주 좁으며 각 부분의 조성기법이 형식적이고,
각 층의 체감률(遞減率)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감을 주고 있다.
미륵대원지와 함께 마의태자와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고 한다.
이 탑의 꼭대기에 마치 피뢰침처럼 휘어져 있는 철제 찰주(擦柱:탑 꼭대기 중심 기둥)는
의상대사가 꽂아둔 죽장이라는 전설도 있다 한다.
5층석탑 (보물 제95호)
미륵불 쪽으로 좀더 전진하여 석등 앞으로 간다.
팔각석등과 미륵불
이 석등의 받침돌은 4각형으로 윗부분에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 간주석은 무늬 없는 8각형의 돌기둥이고, 상대석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다.
위로는 등을 설치했던 8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과 상륜부 받침을 두고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팔각석등
드디어 감실 앞에 다가선다.
감실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석불입상은 미륵리 절터의 주존불로서 특이하게 북쪽을 향해 서 있는데
이것은 마의태자 꿈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이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곳에 미륵불을 세우라고 했다는 전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얘깃거리는 덕주공주가 월악산 영봉 기슭에 세워놓은 마애석불과 마의태자가 세운 이 미륵불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나라를 잃은 왕자와 공주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맘을 담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감실과 석불입상
석불입상을 둘러싸고 있는 감실은 본래 석굴식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석축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석불의 표정이나 신체 등의 조각솜씨는 불상 및 절터의 규모 및 석굴에서 풍기는 웅장함과는 달리 아주 소박한 편이다.
석불입상 (보물 제96호)
다른 부분에 비하여 유달리 흰 얼굴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화재에 의해 석불이 훼손되어 그을린 얼굴부분만 교체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의 거대한 원통형 몸체, 소박한 조각솜씨, 머리의 갓(보개), 엉성한 옷주름 등은 고려초기 충청도 지방의 특색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석불의 손에는 약병이 들려 있다. 그런 점을 들어 이 부처님이 약사여래불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그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석불입상 (보물 제96호)
약병
왼편 감실 앞의 석축 위에는 동자승들이 모여 있다.
눈속에 파묻힌 채 기도를 하고 있는 꼬마 스님들의 진지한 표정이 이쁘다.
동자승
그 옆 단하에는 반야심경이 적혀 있다.
동자승들이 부디 넓고 큰 지혜를 깨우쳐 부처님과 보살이 닦은 경지의 언덕에 이르기를 기원해준다.
마하반야경
감실에서 북쪽으로 되돌아서보니 전방에 눈에 익은 산줄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월악산 영봉(1,094m)이다.
월악산 영봉
덕주공주가 세웠다는 마애불이 저편 어디엔가 서서 이편 석불입상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작년 5월 월악산 등반 후 하산길에 들렀던 덕주사. 극락보전 뒤 거대 암벽에 조각된 높이가 13m에 달하는 마애불이 기억난다.
가수 주현미가 부른 "월악산"이라는 노래는 월악산에 얽힌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사연을 애절하게 담고 있다.
월악산
“월악산 난간머리 희미한 저 달아
천년사직 한이 서린 일천삼백리 너는 아느냐
아바마마 그리움을 마애불에 심어놓고 떠나신 우리 님을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금강산 천리 먼 길 흘러가는 저 구름아
마의태자 덕주공주 한 많은 사연 너는 아느냐
하늘도 부끄러워 짚신에 삿갓 쓰고 걸어온 하늘재를
월악산아 월악산아 말 좀 해다오 그 님의 소식을”
[노래: 주현미, 작사:이종학, 작곡:백봉]
마의태자 영정과 월악산 마애불
감실에 머물던 발걸음을 돌려나오던 중 개울가에서 공기돌 바위를 발견한다.
고구려 온달장군이 죽령과 계립령 이북의 고토(故土)를 회복하지 않으면 되돌아 오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군사를 이끌고 이곳으로 와서 성을 쌓고 군사들을 훈련시킬 당시, 이 공깃돌을 가지고 힘자랑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미륵당 내의 물을 마셔서 힘이 세졌다고 한다. 미륵당 내의 물? 그 약수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온달장군 공기돌 바위
개울 건너편 가건물에 '대웅전' 현판이 걸려 있다.
이쪽 편에 가람배치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곧 중창불사를 할 계획인가 보다.
대웅전
이제 절터를 벗어나려던 중 불쑥 놓쳐버린 포인트가 생각 난다.
어느 답사기를 읽어보니, 이곳에 계신 스님께서
'마음 착한 이가 석불입상을 보면 자비롭고 화사하게 웃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음 이 사악하다는 증거입니다' 라고 하셨다고 한다.
부리나케 석불입상으로 다시 가서 미륵불을 찬찬히 바라본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미륵불께서 눈싸움에 졌다는 듯 근엄한 모습을 잠시 풀고선 찡끗 웃음을 짓는다. 음~ 역시 나는 착한 사람이야.. ^^
석불입상 (보물 제96호)
다시 월악산 영봉을 바라보며 미륵리사지를 벗어난다.
월악산 영봉
V. 돌아오는 길
오후 1시14분, 미륵리사지에서 하늘재로 향한다.
하늘재 입구에 세워진 솟대와 장승 옆을 지나 산책로에 접어든다.
솟대
장승
"하늘재 아리랑"
하늘아 땅아 열려라 하늘재 넘어가련다/아리 아리랑 하늘재 아리랑
한 많은 세상 등지고 새 세상 찾아가리라/아리 아리랑 하늘재 아리랑
하늘재 넘어갈 제 굽이 굽이야 눈물이 난다/아리 아리랑 하늘재 아리랑
[출처: 경항신문 & 미디어칸, 지은이: 소설가 박태순]
산책길
오후 1시48분, 하늘재 마루에 다시 올라선다.
하늘재 관리소
계속해서 고개를 넘어 차를 세워두었던 곳으로 간다.
주차장 가는 길
오후 1시54분, 주차했던 곳으로 와보니 승용차는 온전히 잘 있고,
주변 길도 적당히 녹아내려 운전하는 데 지장이 없는 듯 하다.
승용차를 몰고 관음리로 내려가던 중 오전에 지나쳤던 포암사를 들러본다.
포암사 입구
포암산의 삼베문양 절벽이 볼수록 특이하다.
포암산과 포암사 입구
포암사 경내에 들어서니 꽤나 너른 마당에 각종 특이한 석조물들이 세워져 있다.
포암사 경내
입구 우측 포암산 아래에는 명상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암벽의 반듯한 기운이 명상하는데 도움을 줄 듯 싶다.
명상센터와 포암산
마당 한 켠에는 포대화상이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앉아 있다.
그 왼편으로 대미산과 여우목재가 건네다 보인다.
포대화상과 대미산
여우목재 우측으로는 대미산으로부터 가지치기를 한 운달지맥이 보인다.
마전령, 장구령, 장군목을 지나 운달산 정상(1,097m)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포대화상과 운달지맥
포암사를 빠져나와 문경으로 향한다.
문경시(점촌)에 들러 늦은 점심식사를 한 뒤 대전으로 출발한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녘으로 넘어간다.
지는 해를 서러워하던 마의태자의 한(恨)은 대의(大義)일까? 사심(私心)이요 욕심(慾心)은 아닐까?
고속도로
VI. 쫑
"마의 태자"
- 이은상
그 나라 망하니 베옷을 감으시고
그 榮華 버리니 풀뿌리 맛보셨네
애닯다 우리 太子 그 마음 뉘 알고
風岳山 험한골에 한 품은 그 자최(취)
지나는 길손마다 눈물을 지우네
太子城 옛터엔 새들이 지저귀고
居하신 궁들은 터조차 모를노다
설워라 우리 太子 어데로 가신고
黃天江 깁흔(깊은) 물에 뿌리신 눈물만
곱곱이 여울 되어 萬古에 흐르네
영화 속의 마의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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