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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 김천 섬계서원/청암사"
o 날짜: 2009년12월. 체육의 날
o 날씨: 맑음 -1.2℃~2.6℃ (경북 김천)
o 장소: 섬계서원(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청암사(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I. Intro..
김천 섬계서원과 청암사를 답사한다.
지도
섬계서원(剡溪書院) (소재지 :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1802년(순조 2)에 창건되었으며
1456년에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박팽년(朴彭年) 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순절하였지만
1978년부터 사칠신(死七臣) 시비로 의견이 분분했던 이조판서 충의공 백촌 김문기(忠毅公 白村 金文起)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맏아들 영월군수 여병재 현석(如甁齋 玄錫)공을 배향(配享)으로 하고,
동별묘(東別廟)에 반곡(盤谷) 장지도(張志道) 참봉 절효 윤은보(參奉 節孝 尹殷保) 남계 서즐(南溪 徐즐)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3)에 대원군의 명으로 헐어서 걷어치우고 그 자리에 애석한 마음을 새겨 비를 세웠다.
1914년에 그곳에 강당만을 세웠다가 1959년에는 이 고을의 선비 이만영(李晩永) 박원동(朴元東) 이현돈(李鉉墩) 등이
각지 유림에서 재건의 호소문을 내고 본손인 김연식(金淵植) 철규(喆圭) 석규(錫圭) 정연(貞淵) 정수(正洙) 등이
사방에서 모금하여 1961년에 봄에는 본당인 세충사(世忠祠)를 다시 세워 종전의 주향만 봉한하고
별묘까지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여 본당을 가로막아 동에는 삼현(三賢)을 향배하여 춘추로 향사하고 있으며
지금 이만영의 상량 송문(上樑 頌文)이 있다.
- 출처: 맵키워드(www.wooric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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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계서원 (사진출처: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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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靑巖寺) (소재지 :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불령산 북쪽 기슭인 증산면 평촌리에 있으며 조계종 제8교구의 직지사 소속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직지사와 함께 김천을 대표하는 절이다.
대웅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고, 대웅전 앞 다층석탑도 경북 문화재자료 제121호이다.
신라 헌안왕 3년인 859년에 도선이 처음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오랫동안 연혁이 전해지지 않다가 조선 시대에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조선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났을 때 이곳에 기거한 일이 있어
인현왕후 복위 이후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불령산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었고, 조선 말기까지 상궁들이 내려와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기도 했다.
인조 25년과 정조 3년에 각각 화재로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재건되었다.
1897년에 폐사되었다가,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복원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1911년에 화재로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주지인 대운(大雲)이 복구했다.
일제 강점기에 박한영이 머물며 강론하는 등 불교 강원으로 맥이 이어졌다.
1987년에 청암사 승가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비구니 강원이 설치되었다.
- 출처: 위키백과 (http://enc.daum.net/dic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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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승가대학 (사진출처: "청암", 2008년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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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섬계서원
경부고속도로 김천 IC가 다가올 즈음 전방에 금오산이 뿌연한 산자락를 펼치고 있다.
구미의 진산인지라 그 부근에서만 보이는 산인 줄 알았는데, 이 지역에서도 그 너른 품이 보인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된다.
금오산
김천 IC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엔 커다마한 조경시설물이 세워져 있다. 가만 바라보니 상모를 돌리는 형상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지역 전통농악인 '빗내농악'을 홍보하고 내방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최근 김천시에서 조성한 '비상'이라는 주제의 모형이라 한다.
상모
3번국토를 타고 시내를 관통하여 교외로 20분 가량 가다보니 고개가 나온다.
고개마루에 장승과 돌탑이 세워져 있는데 심상찮은 사연이 있을 듯 싶어 차에서 내려 살펴본다.
대방이재
옆에 세워진 안내문을 읽어보니..
한국전쟁당시 김천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및 김천형무소 재소자 등 수백명이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특무대(CIC)와 현병대에 의해 이 부근 대뱅이재 골짜기에서 집단 학살되었다고 한다.
전쟁 발발 직후 국군이 인민군에 쫓겨 남으로 밀려내려올 때
군헌병대가 대전교도소 수감자들 중 사상범과 중형수 3,000여명을 인계받은 뒤
대전 산내면 낭월리의 식장산 자락으로 굴비 엮듯이 끌고와서 마구잡이로 학살하였다는 것을 몇 년전에 들은 바 있다.
그런데 그 참혹한 도륙의 현장을 이곳에서 또 접하게 되니
전쟁 중에 희생된 억울한 영령들이 얼마나 많은 지 쉽게 가늠되지가 않는다.
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무고한 영령들이 억울한 한을 품고 이 강토를 떠돌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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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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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이재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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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3번국도를 타고 20분 가량 남진하니 마을 진입로가 접하는 삼거리가 나온다.
그 옆에 섬계서원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섬계서원 진입로 (대덕면 가례리)
SkyView 지도 - 현위치 (대덕면 가례리)
우회전하여 진입하니 곧 바로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 5분 가량 마을 깊숙이 들어서니 전답 너머 또 다른 마을이 보인다. 그 부근에 섬계서원이 있는 모양이다.
조룡리 마을
김천 IC에서 출발한지 40분만에 섬계서원 앞에 당도한다.
SkyView 지도 - 섬계서원
태극 문양이 그려진 솟을대문 왼편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섬계서원지방문화재지정기념비"라 쓰여 있다.
섬계서원은..
1456년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체포되어 순절한 이조판서 충의공 백촌 김문기 선생을 기리기 위해
1802년(순조 2년)에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3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게 되었는데
최근 자손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섬계(剡溪)는 이 마을 조룡리(釣龍里)의 옛 이름인 섬계리(剡溪里)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섬계서원
그런데 대문이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다. 이곳까지 왔으니 들여다보고 싶은 맘이 당연한 데..
서원 뒷편을 바라보니 담장 너머로 삐죽 솟아오른 나무가 얼핏 보인다.
잎파리를 죄다 떨구고 있는 그 나무가 바로 수령이 50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인 모양이다.
섬계서원
서원 왼편 담장을 따라 간다.
그 길목에도 제법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괴목이 서 있다.
괴목
그 괴목을 지나 담장 끝에서 우측으로 돌아든다.
뒷길
그 길에 들어서니 기괴한 형상의 나무가 서 있다. 아까 서원 담장 너머로 보았던 바로 그 은행나무다.
금릉 대덕면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0호)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지정된 것으로서 수령이 500년 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높이 28m, 둘레 11.6m, 밑둥 둘레 12.5m이고, 가지길이는 동쪽으로 6.8m, 서쪽으로 12.3m, 남쪽으로 9.1m, 북쪽으로 13.4m나 된다고 한다.
섬계서원이 건립되고 나서 심어졌다고 전하지만 근거는 없다고 한다. 근거 없음이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섬계서원의 이력이 200년 밖에 안 되는데 은행나무 나무는 500년이나 된다고 하니 그 자체로 아구가 맞지 않기 때문이리라..
금릉 대덕면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0호)
나무가지에는 특이한 형상의 곁가지가 달려있다. 마치 나무로 된 종유석 형상이다.
그것이 이 나무가 더욱 관심을 끌게 하는 '유주'라고 한다.
유주
[고규홍의 식물 이야기] 숨쉬는 뿌리, 은행나무 유주
(전략) 은행의 생존법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특별함이 하나 있다. '유주(乳柱)'. 다른 나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은행나무의 특별한 현상이다.
유주는 하늘을 향해 높이 뻗은 나뭇가지에서 돋아난 일종의 뿌리다. 흙 속에 묻힌 뿌리의 호흡만으로 모자란 숨을 보충하기 위해 허공에 드러난 뿌리다. 석회암 동굴의 종유석처럼 땅을 향해 자라는 유주는 오래된 은행나무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유주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여인의 젖가슴을 닮은 생김새에서 비롯됐다. 경남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는 실제로 여인의 젖가슴을 빼닮았다. 그 형태 때문에 오래 전부터 아이를 낳고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産母)가 이 나무에 정성을 들이면 젖이 잘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름은 유주지만, 여인의 젖가슴보다 어른 남자의 생식기를 닮은 유주가 훨씬 많다는 것도 흥미롭다. 크기와 모양이 각각이지만, 위에서 아래로 곧게 뻗어 내리다가 끝에서 버섯의 갓 모양으로 마무리한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우습기도 하고, 더러는 오래 바라보기에 민망스러운 유주도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어김없이 그 독특한 생김새에 기댄 전설이 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충남 태안 흥주사의 900년 된 은행나무 전설이다. 이 나무는 오래 전부터 아들을 낳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많은 여인들이 이 나무에 지극 정성을 들였다.
이 은행나무에 언제부터인가 유주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돌기처럼 나오던 것이 차츰 남자 성기와 같은 모습으로 자랐다. 지금은 30㎝가 조금 넘는 크기까지 자랐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게 해주는 신통력을 가진 나무의 상징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여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수컷의 특징이 발현했다는 이야기다.
(후략)
- 저자: 고규홍/천리포수목원 감사, 출처: 국민일보 쿠키뉴스/2009.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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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 (사진출처: 국민일보 쿠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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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나뭇가지 곳곳에 유주가 자라고 있다.
북쪽 지방에서는 은행나무에서 저 유주를 하나라도 발견하면 호들갑을 떨 정도로 많은 유명세를 치룬다고 하는데
이 나무에는 부지기수의 유주가 쉽게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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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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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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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수령이 200년이 넘어야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노목으로서 끝 없는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낸 현상이라니 신비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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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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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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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밑둥치 주변은 돌담장으로 보호되고 있다.
노구의 천연기념물이니 만치 정성껏 관리하고 보호해야 하리라..
은행나무 하단
멀찌감치 물러서서 바라보니 여느 은행나무와 달리 사람 손길이 가지 않은 듯 나뭇가지가 자유롭게 뻗치고 있다.
어찌보면 음산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기괴해 보이기도 한다.
500년의 세월동안 생명의 신비를 끝없이 발현하며 저 자리에 지키고 서 있었으리라..
은행나무 원경
III. 청암사
조룡리 마을을 벗어나 3번국도로 나온다.
네비에 "청암사"를 찍은 뒤, 네비가 일러주는 대로 잠시 김천시 방향으로 되돌아 나가다가 우측으로 이어지는 703번 지방도를 타고 남진한다.
한 동안 산기슭을 넘나드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20분 가량 전진하다가 증산면 읍내에 도착한 뒤 30번국도에 진입하여 서진한다.
조금 전진하다보니 청암사 입석이 세워진 삼거리가 나오고 그곳에서 왼편 길로 접어들어 5분 가량 전진하니 청암사 일주문이 나온다.
섬계서원에서 은행나무 사진을 찍은 것을 마지막으로 카메라 밧데리가 방전되어 이곳부터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청암사 일주문 [폰카]
SkyView 지도 - 현위치 (청암사 일주문)
섬계서원에서 출발한지 30분만에 청암사 사천왕문 앞에 도착한다.
청암교와 사천왕문 [폰카]
사천왕문 앞에 비교적 너른 공터가 있기에 그곳에 주차하고 하차한다.
사천왕문 우측의 석축 위에는 비각이 세워져 있다. 1900년대에 청암사를 중건했다는 대운병택조사(1868~1936)의 비각인 것 같다.
청암사 비각 [폰카]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개울 옆 길을 따라 경내로 들어간다.
조금 더 전진하니 개울 건너편 바위에 갖가지 필체의 글씨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글씨 면면들이 허투르게 낙서하듯 갈겨쓴 것들이 아니지만 바위 전면을 온통 도배하듯 해놓아 과히 보기 좋진 않단 생각을 하며 지나간다.
그런데 나중에 사진을 보면서 바위 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써진 이름 "최송설당"을 검색해보니 관심을 확~ 끌어댕기는 자료가 나타난다.
바위와 최송설당 [폰카]
최송설당.
조선조 마지막 궁중여류시인이자 김천 중고교 설립자이며, 김천에서는 '고부할매'로 통한다는 것이다.
궁중여류시인? 김천 중고교 설립자? 고부할매? 서로 연관 짓기가 쉽지 않은 세 종류의 수식어가 한 여인에게 붙어 있는 것이다.
흥미가 확~ 동하여 관련 자료를 모아서 정리해놓는다. 이런 분이 있었구나..
| 조선조 마지막 궁중여류시인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
김천 중ㆍ고교 설립자인 최송설당을 경북 김천에서는 '고부할매'로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전라도 고부 출신 할머니라는 뜻이다.
1855년(철종 6년) 금산군(金山郡. 경북 김천)에서 홍경래의 난에 멸문이 되다시피 몰락한 화순 최씨 사대부 집안에서
아들 없이 세 딸 중 장녀로 태어난 최송설당은 집안을 일으키고, 억울하게 죽은 조상의 원한을 풀고자 절치 부심했다.
그가 1912년 8월에 쓴 "송설당서"(松雪堂序)에 의하면 이 때문에 결혼까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 나이 28세가 가까워지자 (집안에서) 바야흐로 혼인을 시키자는 의논을 할 때 내가 맹세하며 말하기를
'한번 남에게 내 몸을 맡긴다면 친정 일을 돌볼 겨를이 없을 것이니 결코 내 뜻을 따라 시집가지 않겠노라'고 했다."
이후 "악착스런 비둘기처럼 재산을 모으고 모으기"를 수십 년 동안 해서 마침내 "광무 5년(1901) 신축년 겨울에
하늘에 태양이 두루 비춰주심을 받고는 옛날의 원통 함을 시원하게 씻음으로써 따뜻한 봄날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1894년 고향 김천에서 상경한 최송설당은 고종의 계비(繼妃)인 엄비(嚴妃)와 가까워지고,
때마침 1897년 그가 황태자 이은(李垠.영친왕)을 낳자 입궐해 그의 보모 가 되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마침내 몰적(沒籍) 89년만에 집안을 복권시켰다.
말년에 전재산을 쾌척해 1931년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고교)를 설립하게 되는 이 여인은
58세 때인 1912년 8월 경성 무교동(현재의 코오롱빌딩 자리)에 저택을 설립하고는 당호(堂號)를 송설당(松雪堂)이라 했다.
송설당은 68세때인 1922년, 당시까지 쓴 한시 167제 285수와 국문가사 50편 및 제문 등을 묶어 '최송설당문집'(3권3책)을 간행한다.
이 문집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학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 저작권자(c)연합뉴스 (200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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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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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교로 향하는데 비구니 한명이 걸어나온다.
청암사는 비구니 절이며 승가대학이 있는 곳이라 한다.
극락교와 비구니 [폰카]
개울 건너편에 많은 전각들이 자리잡고 있다.
극락교 [폰카]
발걸음은 자연히 그쪽으로 향하고 있다.
육화료, 정법루 [폰카]
극락교를 건너니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정법루 왼편에 육화료가 자리잡고 있다.
얼굴이 무척 어려보이는 비구니가 그쪽으로 걸어간다. 안스러움이 들어서 그런지 공연히 그 뒷모습을 쫓게된다.
정법루와 비구니 [폰카]
정법루 우측 편으로 돌아 드니 진영각이 나오고..
진영각 [폰카]
그 왼편으로 들어가니 대웅전이 나온다.
전면 3칸, 측면 3칸에 전형적인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아담한 전각이지만 푸른 기와가 눈길을 끈다.
대웅전 [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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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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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 가람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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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 마당에 석탑이 있다.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네 개 있기에 4층석탑이라 생각했는데 안내문에는 다층석탑이라 되어 있다.
지대석, 하층기단, 상층기단을 빼고 나면 분명 탑신이 네개인데.. 무엇이 혼돈스럽기에 애매모호하게 다층석탑이라 했는지 모르겠다.
다층석탑[폰카]
대웅전 처마의 다포기둥은 고색창연함이 느껴질 정도로 단청이 많이 퇴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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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1[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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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2[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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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 마당 한켠에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헐벗은 가지를 보니 이 나무도 남 못지 않게 험난한 풍파를 헤치고 살아온 듯 싶다.
앙상한 나무 [폰카]
바로 옆에는 육화료(六和寮)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건물이 있다.
새을(乙)자 형의 귀틀을 지닌 전각으로서 108평이나 되는 너른 방을 가진 승가대학의 중심을 이루는 건물이라 한다.
육화(六和)란 깨달음을 구하고 깨끗한 행을 닦되, 서로 친절하고 경애하는 신(身), 구(口), 의(意), 戒(계), 견(見), 이(利) 등
여섯 가지 법으로서 화합하여 마침내 사자굴 안에서는 모두 사자가 되고, 전단나무 숲에서는 순전히 전단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승가의 실천 사항이라 한다.
육화료 [폰카]
정법루 옆을 빠져나와 범종각 옆을 지나고..
범종각 [폰카]
다시 극락교를 넘어 남쪽으로 걷다보니 길 우측으로 이끼가 잔뜩 낀 담장이 보인다.
부도군 울타리 [폰카]
돌담 너머로 범상치 않은 비와 탑이 보이기에 그 안으로 들어가본다.
부도군 울타리 [폰카]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커다마한 부도비와 부도탑이다.
그런데 한문으로만 빼곡하게 써 놓아서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강고봉스님이란 분의 부도탑과 비석이라 한다.
부도비 [폰카]
부도탑 [폰카]
부도비와 부도탑 뒤에도 몇 개의 석종형 부도가 새까만 이끼를 뒤짚어 쓴 채 자리를 잡고 있다.
부도군[폰카]
담장을 빠져나와 다시 걷다보니 우측에 누각이 보인다.
그 즈음 강론시간이 되었는지 많은 비구니들이 극락전을 넘어와 앞에 보이는 자양전쪽으로 향한다.
무척 어려보이는 비구니들이 지나가며 나누는 얘기를 잠시 듣자하니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수다 떠는 것처럼 해맑다.
자양전 [폰카]
그것으로 사찰 관람을 마치고 다시 청암교를 건너와 주차장으로 돌아온다.
나중에 알고보니 장희빈 때문 폐위된 인현왕후가 잠시 기거했다는 극락전과 보광전이 좀 전에 지나온 자양전 너머에 있었다고 한다.
그 한 많은 사연이 깃든 전각을 들르지 못한 것에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불시에 찾아간 만치 이 정도로도 만족할 만한 답사였다고 치부한다.
청암교 [폰카]
V. 쫑
조선조 마지막 궁중여류시인인 최송설당님의 시를 옮기며 나직히 읖조린다.
한탄하지 마라.. 맑은 향기는 멀리서도 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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