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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100대명산

산행기 - 봉화 청량산 (2009.9.12)

by 청려장 2009. 9. 20.

"산행기 - 봉화 청량산(870m)"

청량산 (촬영장소: 연적봉 부근 무명봉)

o 일시: 2009.9.12(土) 11:34 ~ 16:08 (총 4시간 34분) o 날씨: 비 12℃~22℃ (경북 봉화) o 코스: 선학정→청량사→뒷실고개→하늘다리→장인봉→뒷실고개→자소봉→경일봉→산꾼의집→응진전→입석→하청량 o 거리: 10.4km o 참석: 한뫼사랑산악회 38명 ☆ Time Table :
시 각 구 간 거 리 시 간 속 도
11:34~12:41 선학정→뒷실고개→장인봉 2.9km 1:07' 23'10"/km
11:34  선학정 (↑청량사 0.8km)
11:45  산꾼의 집 갈림길
11:46  청량사 [관람 9분]
11:57  갈림길 (↖하늘다리 1.3km, ↗자소봉 0.9km)
12:13  뒷실고개 (←하늘다리 0.5km, ↓청량사 0.8km, →자소봉 0.7km)
12:19  자란봉
12:20  하늘다리 [촬영 5분]
12:31  선학봉
12:33  청량폭포 갈림길 (↑장인봉 0.3km, ←청량폭포 1.5km, ↓하늘다리 0.5km, ↓자소봉 1.6km)
12:41  장인봉(870m) [전망대 조망 11분]
13:52~13:18 중식 (장인봉 정상 옆 공터) - 0:26' -
13:18~14:10 장인봉→뒷실고개→자소봉 2.0km 0:52' 26'00"/km
13:18  장인봉
13:23  청량폭포 갈림길
13:27  하늘다리
13:34  뒷실고개
13:39  연적고개 (↓장인봉 1.5km, →청량사 0.9km, ↑자소봉 0.6km)
13:45  전망좋은 무명봉 [조망 2분]
13:50  연적봉 [우중 대기 10분]
14:02  탁필봉 옆
14:07  자소봉 갈림길(↓장인봉 1.6km, ↓탁필봉 0.2km, →청량사 0.9km, →응진전 1.4km, ↑경일봉 1.2km)
14:10  자소봉(840m) [촬영 2분]
14:12~15:09 자소봉→김생굴→산꾼의집 2.2km 0:57' 25'54"/km
14:12  자소봉
14:38  경일봉 [촬영 2분]
14:52  김생굴 갈림길 1(→김생굴 0.1km, →자소봉 1.0km, ↓경일봉 0.5km)
14:54  김생굴 갈림길 2(↑청량사/응진전, →김생굴 0.?km, →자소봉 0.8km, ↓경일봉 ?km)
14:59  김생굴 [촬영 3분]
15:06  갈림길 (↑응진전 0.4km, →청량사 0.4km, ↓김생굴 0.2km)
15:09  산꾼의집 [관람 7분]
15:16~15:21  청량사쪽으로 가다 되돌아 옴 [지체 5분]
15:21~16:08 산꾼의집→응진전→입석대→하청량 3.3km 0:47' 14'14"/km
15:21  산꾼의집 (↓청량사, ↑경일봉/응진전)
15:24  갈림길 (→응진전 0.4km, ↓청량사 0.4km, ←김생굴 0.2km)
15:27  어풍대 [촬영 3분]
15:30  총명수
15:33  응진전 [촬영 6분]
15:41  전망대 [촬영 2분]
15:47  이정표(→하늘다리 2.5km, →청량사 1.0km, ↓응진전 0.6km, ↓김생굴 1.1km, ↓자소봉 2.0km, ←입석 0.3km)
15:50  입석대
16:01  선학정 (↑청량폭포 0.9km, ↑매표소 1.9km, ↓입석 0.9km, ↓산성입구 1.3km)
16:08  하청량(청량폭포 입구)
종 합 11:34~16:08 10.4km 4:34' 26'20"/km (2.27km/hr)
※ 지체시간: 총 1시간33분 (중식 26분, 휴식&조망&대기 1시간07분) ☆ 산행코스

산행계획

◎ 등반 메모 ◎
o Intro..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로다 백구가 훤사(喧辭)하랴마는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주자(魚舟子)가 알까 하노라 청량산은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가 입을 다물고 나온다'는 말이 있는 산이라고 한다. 즉 수려한 경관에 놀라 입을 벌리고 들어갔다가 나올 적에는 그 비경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서 입을 다물어 버린다고 해서 생긴 말이라 한다. 위 시는 퇴계 이황선생께서 남긴 것이다. 선생께서도 자신이 유년 및 노년을 보낸 청량산의 비경을 세상에 알리기 싫었던 모양이다. (註: 육육봉=12봉, 백구=갈매기, 훤사= 야단스레 떠드는 것, 도화=복사꽃, 어주자=고기잡이)
청량산(淸涼山, 870m)은
경북 봉화읍 동남쪽 29km, 안동시 동북쪽 24Km에 위치하며
낙타혹 같은 봉이 연립한 기이한 경관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산으로서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는 12 암봉(육육봉), 12대(臺)의 전망대,
김생굴 등이 유명하다.
산줄기는 경북의 동북부 고산지대에서 좌장 역할을 하고 있는
일월산(1,218m)에 그 맥이 닿아 있고,
낙동정맥의 주류에서 벗어난 지맥에 속해 있다.
산자락엔 낙동강 상류인 명호강이 흐르고 있으며, 곳곳에 깍아지른 층암절벽과
수려한 암봉들이 어우러져 있는 전형적인 바위산으로 
가까운 청송의 주왕산(720.6m), 전남 영암의 월출산(808.7m)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악(奇嶽)으로 꼽힌다.
[참조: 다음블로거 아미산님의 "봉화 청량산(청량산;870m) 산행기"]

산경도

청량산(淸涼山)에 얽힌 이야기..

    우리나라 서원의 창시자 주세붕(周世鵬)은 청량산을 다녀가서 쓴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이라는 산행기에 '청량산은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여, 비록 작기는 하지만 쉽게 가까이 할 수 없는 산이다'라고 했단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은 그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청량산은 백두대간 밖의 4대 명산 중에 하나이고, 우리나라 12대 명산 속에 든다고 하였다.

    주세붕은 명산이란 산세가 수려해 옛 사람의 발자취와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흥건하게 스며 있거나 이름 난 절간이 들어앉아 있던지 골짜기의 천석(泉石)이 빼어나서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그런 산이라 하였다. 청량산은 이런 명산론에 정말 잘 어울리는 산으로 장대하지 않지만 오밀조밀 옹골차고 어디 한 곳 흠 잡을 데가 없다. 그리하여 아침에 깨끗하게 몸 단장을 마치고 뜨락에 나온 단아한 처녀와도 같은 그런 산이라 하겠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의 청량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얻어 귀국하게 된 즉, 문수보살이 '너희 나라에도 청량산이 있느니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말을 듣고 귀국한 자장율사는 그 청량산을 찾다가 오대산(1,563m)을 청량산인 줄 잘못 알고, 거기에다가 적멸보궁을 지어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모셨다고 한다. 그후 봉화의 작은 산에 들렸다가 '아! 이 산이 청량산이거는'하고 한탄을 했다고 하며, 그 이후 이 산이 청량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청량산은 최고봉인 장인봉(일명 의상봉)을 비롯하여 경일봉, 자소봉(일명 보살봉), 탁필봉(일명 문필봉), 금탑봉 등 12개의 암봉(六六峰)이 총립해 있고 어풍대, 고운대 등 12 대(臺)가 있으며, 산자락엔 3개의 굴과 4개의 약수가 있다. 이러한 청량산의 모습을 간단히 줄여서 '육육봉, 12대, 3굴, 4정'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청량산 12봉(육육봉)들이 울룩불룩한 낙타등처럼 생겨서 타자산(駝子山)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일명 수산(水山)이라고도 했다.

    한 때 청량산 속에 30여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원효대사(혹은 의상대사라고도 함)가 창건했다는 청량사와 응진전(외청량사)만 남아 있다. 이외에도 청량산엔 많은 역사적 사연과 이에 얽힌 흔적이 남아 있어서 산 전체가 문화유적이다시피 되어 있다. 즉 신라시대의 것으로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대와 의상대가 있으며,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이 서예를 공부했다는 김생굴이 있는가 하면 최치원(崔致遠)이 샘물을 마셔 정신이 더 맑아졌다는 총명수라는 샘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청량산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이 전하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蒙塵)을 와서 이곳에 쌓았다는 청량산성이 있는가 하면, 노국공주는 응진전에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주세붕이 열두 봉우리의 이름을 지었고, 이 고장 출신인 퇴계 이황이 어려서 공부를 하였으며, 훗날 성리학을 집대성했다는 오산당(청량정사)이 있으니 산 하나에 이 보다 더 많은 역사적 사연이 얽혀 있는 곳은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따라서 주세붕이 청량산을 찾은 후 쓴 산행기 이후 100여 편의 기행문이 씌어졌으며, 시는 1,000여 수가 지어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퇴계 선생은 '청량산을 가보지 않고는 신비 노릇을 할 수 없다'라고 했다 한다. [출처: 다음블로거 아미산님의 "봉화 청량산(청량산;870m) 산행기"]
o 이동.. 오전 8시, 대전 IC 초가집 앞에서 산악회버스에 탑승한다. 대전IC를 통해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여 북진.. 남이분기점에서 청원-상주간 고속국도로에 접어들어 동진.. 남상주 IC를 지나 낙동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북진.. 문경에서 중앙고속국도를 빠져나와 34번 국도를 타고 동진.. 오전 10시40분경 안동시내를 통과하여 36번국도를 타고 북진하여 안동소주 홍보관을 통과한 후.. 오전 10시57분, 역동선생 유허비를 지난다.

역동선생 유허비(易東先生 遺墟碑)

안동호 상류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2-1342)은 고려말 대표적 성리학자로서 후학으로부터 숭모를 받던 분이다. 역동선생은 선비로서의 기개 높을 뿐만 아니라 관리로서도 충직했다 한다. 충선왕 즉위 원년(1308년)에 우탁은 감찰규정으로 있었다. 왕이 부왕(충열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가까이 지내자 선생은 흰옷에 거적과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목숨을 걸고 인륜과 도덕을 간언했다. 이 일이 있고난 뒤 충선왕이 부끄러움을 느껴 다시는 선왕의 후궁과 통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벼슬을 사퇴하고 복주의 예안현(안동시 와룡면 선양동, 안동댐 건설로 수몰)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충숙왕이 역동의 충의를 높이 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만년에 잠깐 성균관좨주직을 맡아 후진을 가르쳤다. 卓爾弗群(탁이불군): 탁아 너는 간사한 부류가 아니다. 確乎不拔(확호불발):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확고할 것이며 獨立不懼(독립불구): 홀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遯世无悶(돈세무민): 은둔함에도 번민함이 없을 것이다. 1570년(선조 3), 퇴계선생이 안동지방에 최초로 서원을 창건하였는데 그 서원이 역동서원이다. 이 서원은 우탁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배양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그분의 위패를 서원에 모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복원하였으나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었다고 한다. 우탁선행의 옛집에 세워졌던 유허비각도 안동댐 때문에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라 한다. 오늘날 전해져 내려오는 고시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탄로가(嘆老歌)'도 이분의 작품이라 한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불더니 간 데 없다. 적은 듯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저 귀 밑의 해 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 어느덧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바라볼 즈음.. 굽어돌아가는 산자락 너머로 청량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전 11시11분)

청량산 자락

오전 11시17분, 청량산 도립공원에 진입한 뒤..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

오전 11시29분, 선학정 옆 주차장에 도착한다.

선학정 주차장

선학정 갈림길

예상했던 바 대로, 대전 IC로부터 이곳까지 3시간30분 가량 소요되었다.

교통궤적

선학정 맞은편에 청량사로 오르는 등로가 있고 그 옆에 대형 조감도가 세워져있다. 조감도를 보면서 오늘의 코스를 짚어본다.

조감도

o 선학정 → 청량사 오전 11시34분, 산행을 개시한다.

산행개시

들머리에 들어서니 이내 청량사 일주문이 나온다.

청량사 일주문

세멘트로 포장된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진다.

세멘트 포장길

선두대장인 듯 싶은 분을 10분 가량 쫓아올라가다보니 길 우측에 '산꾼의집'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잉? '산꾼의집'이라 하면 청량사 옆에 있는 것으로 아는데.. 산행 예정코스는 청량사 가는 길 중간에서 왼편 병풍바위쪽으로 전진하여 두들미를 거쳐 청량산 최고봉인 장인봉으로 직접 오른 뒤 청량산 주능선을 타고 내려와 마지막에 청량사를 들렸다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청량사 근처에 있는 산꾼의 집을 만났다는 것이 이상하다.

산꾼의집 갈림길

일단 그곳을 지나 계속 올라가니 이내 산사 건물이 나타난다. 이미 사진으로 보아두었기에 이곳이 청량사 입구임을 곧바로 눈치챈다. 결국 병풍바위 코스를 지나치고 청량사까지 온 것이다.

청량사 입구

청량사 안내판 옆에 서 있는 선두대장에게 병풍바위코스로 가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올라오던 도중 그 코스입구가 눈에 띄지 않아 이곳까지 올라오게 되었다고 한다. 허긴, 나도 중간 중간 길 왼편을 살펴보았는데 뚜렷한 진입로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내심 병풍바위 코스에 대해 기대를 했지만 이제와서 다시 내려가 그 진입로를 찾아가는 것은 무리다 판단하고 청량사 뒷편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타고 올라 청량산 정상으로 오르기로 한다. o 청량사 오전 11시46분, 기왕에 먼저 오게된 청량사를 둘러보기 위해 안내판에 그려진 가람배치도를 우선 살펴본다.

청량사 가람배치도

사찰 첫번째 건물은 안심당이다. 석축 위에 세워진 세칸 건물과 팔작지붕이 뒷편에 솟아 오른 암봉과 멋지게 어울리고 있다.

안심당

청량사의 대웅전격인 유리보전은 안심당 왼편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유리보전 가는 길

범종루와 청류정이 나란히 세워진 곳에서 왼편으로 꺽어돌아가면 돌계단이 연화봉 방향으로 향하는데 유리보전은 우측 석축에 위에 세워져있다. 돌계단 꼭대기에 오를 즈음 왼편을 바라보면 오층석탑이 보인다. 축륭봉을 향하여 우뚝 솟은 첨탑이 하늘을 찌른다.

유리보전 가는 길과 연화봉

오층석탑과 축륭봉

이윽고 유리보전 앞에 선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라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 청량산에는 연대사라는 사찰을 중심으로 대소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었다 한다. 유리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다포계의 집이다. 공포는 외1출목 내2출목의 형식으로 첨차의 짜임이 고졸(古拙)하고, 쇠서의 내부 끝은 연화형 조각을 새기고 있으며 전면 중간 기둥 위에는 용두와 용미를 주두 밑에 내외로 뻗게 하고 있어, 조선 후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청량사 유리보전

유리보전(琉璃寶殿)이라 쓰여진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현판 - 유리보전(琉璃寶殿)

유리보전이란 동방유리광 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란 뜻으로서 이곳 청량사의 정전인 유리보전 안에도 지장보살과 문수보살이 협시해 있는 가운데 금칠을 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약사여래 - 측면

약사여래 - 정면

이 약사여래상은 특이하게도 종이를 짓이겨 만든 지불로서 국내 유일의 것이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저 것이 종이로 만들었졌다는 태가 나지 않는다. 대단한 정성이 들어간 듯 싶다.

약사여래 지불

유리보전 왼편에는 선불장(選佛場)이 있고 그 옆에 요사채 몇 채가 세워져 있다.

유리보전, 선불장, 요사채

팔작지붕의 기와가 단정하다.

선불장(選佛場)과 요사채

선불장 앞에는 분홍잎유홍초가 묵은 가지 위를 타고 오르고 있다. 그 어울림이 아름답다.

선불장과 분홍잎유홍초

선불장 아래에는 범종루가 내려다 보이고 건너편 장독대에는 항아리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범종루

유리보전 맞은 편에는 오층석탑이 세워진 평평한 기단이 있다. 그곳이 청량산의 중심좌표로 삼고 있는 연대(蓮臺)라고 한다.

연대(蓮臺) - 오층석탑

청량사는 저 연대를 중심으로 좌청룡 금탑봉, 우백호 연화봉, 남주작 축륭봉, 북현무 자소봉 등의 풍수지리를 갖는 천하의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연대(蓮臺) - 왼편 금탑봉(좌청룡), 전방 축융봉(남주작)

오층석탑 옆에는 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가 삼각우총으로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옛날 명호면 북곡리 마을에 참의(參議) 남민(南敏)의 집에서 기르고 있던 소가 '뿔이 3개 달린 송아지(三角牛)'를 낳았는데 낙타만큼 크고 사람이 제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청량사 주지스님이 남민의 집을 찾아가 절에 시주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흔쾌히 승낙하여 삼각우(三角牛)를 몰고 와 온순하게 길을 들여 장작과 식량을 운반하는 데 잘 사용하였다. 어느 날 이 삼각우가 죽어서 절 입구에 묻고 묘를 만들어 주었더니 그 무덤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면서 가지가 셋으로 뻗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죽은 소의 넋이라 생각하여 삼각우총이라 부른다고 한다.

삼각우총 소나무

연대 우측편에는 연화봉(蓮花峰)이 솟아있다. 본래 의상봉(義湘峰)이라 하였으나, 암벽(巖壁)이 층(層)을 지고 있고 처음 피어나는 부용(芙蓉=연꽃)같다 하여 주세붕 선생이 개명한 것이라 한다.

연화봉(蓮花峰)

o 청량사 → 하늘다리 오전 11시55분, 청량사 관람을 마치고 산행을 재개한다. 정상으로 향하는 등로는 유리보전을 바라볼 때 왼편(서쪽)에 있다. 그 길로 2분 가량 전진하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하늘다리/장인봉, 오른쪽은 자소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뒷실고개 가는 길

갈림길

그 갈림길에 퇴계선생의 글이 나뭇가지 사이로 걸려있다.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란 글인데 "산을 오르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도 같다"라는 내용이다. 말미에 쓰여진 진솔한 글귀가 마음에 와 닫는다. "늙어서 전진 못하는 이몸 내 깊이 부끄러워라"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

왼편 길로 들어선다. 중간에 잔돌이 널부러진 너덜길이 나온다.

너덜길

그 부근에서 만난 바위. 여늬 바위와 다르게 각종 잡석이 뒤섞인 채 고화되어 있다. 이곳 청량산 암릉의 석질은 퇴적암의 일종인 역암(礫岩, conglomerate)으로 주왕산이나 진안 마이산의 석질과 비슷하다. 역암이란 암릉에 자갈이 섞여 있는 석질로 마치 불량 레미콘처럼 보인다.

역암

이어지는 가파른 돌계단을 타고 올라..

돌계단

오후 12시13분, 뒷실고개에 당도한다. 뒷실고개엔 아이스크림 장사꾼이 등반객을 유혹하고 있다.

뒷실고개

뒷실고개에서 왼편 하늘다리 방향으로 전진한다. 나즈막한 무명봉 하나를 넘어서니 철계단이 고개 양쪽으로 걸려 있다.

철계단 고개

고개를 지나 또 다른 봉우리를 넘는다. 별도 표지석이 없지만 이곳이 자란봉 정상인 듯 싶다.

자란봉?

오후 12시20분, 자란봉에서 내려오니 이내 하늘다리가 나온다.

하늘다리 1

자란봉과 선학봉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로서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무척 아름답다.

하늘다리 2

지난 해 5월 완공되었다고 하는데,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가 향로봉을 경유하여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치고 올라야 맞은편 선학봉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하늘다리 안내

최대 100명이 지나갈 수 있도록 시공되었다는 안내문을 보니 마음이 한층 편안해진다. ^^ 하늘다리 중간부근에는 다리 바닥에 투명유리가 설치되어 있다. 그 안으로 계곡이 까마득히 내려다 보인다.

하늘다리 3

투명유리 바닥

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경치는 기가 막히게 좋다. 좌전방에는 선학봉의 기암봉들이 제 각각 소나무를 이고 있고 그 뒷편 멀리에는 낙동강이 첩첩 산자락 사이로 굽이쳐 흐르고 있다.

좌전방 - 선학봉의 암봉과 낙동강

다리 왼쪽(남쪽)에는 축륭봉, 오른쪽(북쪽)에는 문명산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 - 축륭봉

북쪽 - 문명산

오던 방향을 되돌아보니 다소 지친 듯한 이방인 한 명이 너털너털 거리며 뒤쫓아오고 있다. 혼자 왔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녀의 일행인 듯 보이는 이방인들이 다리 건너편에 모여있다. 내 영어가 형편 없었나 보다. -.-;;

하늘다리 위의 이방인

다리를 건넌 후 되돌아보니, 뒷편 멀리 두 개의 암봉이 솟아 있다. 나중에 위치를 따져보니 우측 봉우리가 자소봉이고, 좌측 봉우리가 연적봉이다. 그 사이에 있는 탁필봉은 다소 낮아 보이지 않는다.

되돌아본 하늘다리, 연적봉과 자소봉(보살봉)

주변에 지나던 산객에게 부탁하여 기념사진 한장 남긴다.

하늘다리 - 청려장

o 하늘다리 → 장인봉 오후 12시30분경, 별도 정상표시가 없는 선학봉을 지나고..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안부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은 청량폭포 즉 하청량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나무계단

안부 갈림길

안부를 지나니 철계단이 이어진다.

철계단 1

철계단 2

가파른 철계단을 벗어나 떡갈나무가 우거진 등로를 지나..

등로

오후 12시41분, 장인봉 정상(870m)에 이른다. 장인봉은 청량산 최고봉인 주봉(主峰)으로서 옛 이름은 대봉(大峰)이었으나 주세봉선생이 개명하였다고 한다. 이 봉우리를 의상봉(義湘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문헌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라 한다. 즉, 청량산의 주봉은 장인봉(옛이름 대봉)이고 유리보전의 서쪽에 있는 연화봉의 옛이름이 의상봉(義湘峰)이라 한다.

장인봉 정상(870m)

정상석 전면에는 장인봉(丈人峯)이라 쓰여 있고, 후면에는 주세붕이 지은 등청량정(登淸凉頂)이란 글을 음각해 놓았다. 여기에 새겨진 글씨는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한다.

정상석 전면

정상석 후면

그 앞에서 주변 산객에게 부탁하여 기념촬영을 한 뒤..

장인봉 정상 - 청려장

정상석 뒷편으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전진하여 전망대에 이른다.

전망대

전망대 앞으로 펼쳐진 산하는 끝이 없다. 전망 중앙에 산자락을 가르며 굽이쳐 흘러가는 강은 낙동강이다. 저물이 안동댐으로 흘러든다.

전망대에서의 조망

낙동강을 중심으로 왼편에 있는 산은 청량산의 한 자락이며 제 2봉인 축륭봉(祝融峰)이다. 축륭(祝融)은 南方의 火神(南方掌火之神)이란 뜻이라 한다.

남서쪽 - 축륭봉(祝融峰)

우측에 보이는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려온 문수지맥 상의 한 산자락인 듯 싶다.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서 서편 멀리 소백산이 보인다고 했는데 가늠이 잘 되지 않는다. 기상이 좋지 않아서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서쪽 - 문수지맥

전방에는 723봉이 낙동강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왼편 계곡이 청량폭포가 있는 하청량 마을인 듯 싶다.

723.3봉

남서쪽 축륭봉에는 능선상에 산성이 있다. 고려 말 1352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이곳까지 몽진을 왔던 공민왕이 저 축륭봉에 청량산성을 쌓았고 공민왕비인 노국공주는 시녀들과 더불어 손수 16나한을 깎아 응진전에 모시고 홍건적 퇴치와 국가안녕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축륭봉 아래 공민왕당엔 공민왕을 청량산 산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응진전엔 노국공주 상을 안치해 놓았다고 한다. (출처: 아미산님 산행기)

남동쪽 - 축륭봉

서쪽 35번 국도 너머에 있는 산에서는 고냉지 채소를 경작하는 듯 산자락이 온통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서쪽 - 산자락의 고냉지 밭

전망대을 벗어나기 전 남쪽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35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끝없이 이어가는 낙동강 물줄기가 아득하다.

남쪽 - 낙동강

오후 12시52분, 다시 장인봉 정상으로 되돌아온 뒤 인근 공터에서 자리잡은 한뫼사랑산악회 선두일행에 합류하여 점심식사를 한다.

점심식사

o 장인봉 → 연적봉 오후 1시18분, 점심식사를 마친 뒤 산행을 재개한다. 오후 1시23분, 청량폭포 갈림길을 지나고..

산행 재개

청량폭포 갈림길

오후 1시27분, 하늘다리에 다시 이른다.

하늘다리

건너편으로 가던 중..

하늘다리

우측 편으로 자란봉의 낙타등 같은 절벽이 눈길을 끈다.

자란봉 암벽

오후 1시34분, 뒷실고개에 이른다. 오전에 청량사 뒷편 등로를 따라 올라온 곳이다. 그곳에서 맞은 편 철제계단을 타고 올라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타고 간다.

뒷실고개

오후 1시39분 연실고개를 지난 뒤 5분 가량 더 전진하니 무명봉이 나온다.

연실고개

무명봉

그 부근에 조망이 좋은 자리가 있다. 남쪽으로 축륭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우측으로 청량사를 감싸고 있는 연화봉과 그 윗 봉오리인 향로봉(香爐峰)이 보인다. 향로봉은 전체적인 모양이 향로와 같이 보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남쪽 - 연화봉, 향로봉(香爐峰)

서쪽으로는 자란봉, 선학봉, 장인봉이 보인다. 자란봉(紫鸞峰)은 난(鸞)이라는 새가 마치 춤을 추는 것과 흡사한 모습이고 선학봉(仙鶴峰)은 학이 공중으로 날아 솟구치는 듯하다 하여 이 역시도 주세붕 선생께서 각각 지어준 이름이라 한다.

서쪽 - 자란봉(紫鸞峰), 선학봉(仙鶴峰), 장인봉

좌우의 봉우리들을 합성하면 보다 멋진 그림이 나온다.

축융봉, 향로봉, 장인봉

맞은 편 축륭봉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을 이수영님의 산행기에서 발견한다.

청량산 전경 (사진 출처: 이수영님 산행기)

그 위에 각 봉우리명을 적어넣으니 12봉(육육봉) 중 11봉의 위치가 명확해진다. (사진에 없는 나머지 한 봉우리는 축융봉으로 이 사진의 촬영지점이다.)

청량산 전경 (사진출처: 이수영님 산행기)

그 즈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한두 방울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드세어진다. 하늘에 검은 구름이 보이는 것을 보면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서둘러 능선을 타고 간다. 가다보니 등로 오른편으로 가파른 철계단이 놓여있다. 오후 1시50분, 계단을 타고 오르니 제법 너른 공터가 있는 봉우리 정상이 나온다. 별도 표지석은 없지만 위치상 이곳이 연적봉 정상임을 눈치챈다. 주세봉선생의 글에 따르면 연적봉(蓮滴峰)은 탁필봉의 서쪽 바로옆에 우뚝솟은 봉우리로서 형상이 연적(硯滴)과 같이 다소 평평한 곳이다.

연적봉(蓮滴峰) 정상

연적봉 전방에는 탁필봉과 자소봉이 나란히 솟아 있다. 탁필봉(卓筆峰, 820m)은 앞에 있는 다소 낮은 봉우리로서 봉우리 형상이 붓끝을 모아놓은 것과 같고 자소봉(紫霄峰, 840m)은 청량산 제3봉으로서 천척(千尺)의 푸른바위가 허공에 수려하게 솟아 아홉 층의 층암을 이루고 있다한다. 이런 연유로 주세봉선생께서 각각 그렇게 이름 지어준 것이라 한다.

탁필봉(卓筆峰)과 자소봉(紫霄峰, 일명 보살봉)

연적봉에 올라서면.. 가까이 탁필봉과 자소봉 뿐만 아니라 천여리 밖의 산하가 바라보인다고 한다. 과연 자소봉 뒷편으로 펼쳐진 산하가 끝이 없으나 비가 내리는 관계로 가시거리는 과히 좋지 않다. 다만 멀리 까마득히 먼 곳에 첩첩 산그리메가 물결치듯 넘실대는 산자락들이 백두대간에서 분기하여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낙동정맥일 것으로 짐작해본다.

자소봉 좌측 조망

자소봉 우측 조망

왼편에 희미하나마 우뚝 솟은 듯 보이는 산자락은 경북 동북부 고산대에에서 좌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일월산(1,218m)인 듯 싶다. 덕유산 도처에 피어있는 일월비비추는 저곳에서 처음 발견되었기에 '일월비비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일월산(1,218m) - 왼편 희미하게 솟은 봉우리

연적봉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서 탁필봉을 바라보면 그 아래로 등로가 보인다. 탁필봉이 워낙 가파르게 우뚝 솟아있어 별도 장비가 없으면 오를 수 없기 때문에 저 아랫 길을 따라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한다.

탁필봉과 자소봉 아래의 등로

자소봉과 청려장

그나저나 비는 그치지 않고 있다. 혹시 그치려나 싶어 그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대기하던 중 시들기 시작하는 산구절초를 발견한다. 시들어가는 꽃을 보니, 고종 때의 가객 안민영(安玟英, 1816~?)이 지은 시조가 떠오른다. 고울사 저 꽃이여 반만 여윈 저 꽃이여 더도 덜도 말고 매양 그만 허여 있어 춘풍에 향기 좇는 나뷔를 웃고 맞어 허노라 반쯤 시들었어도 아직 아름다움이 남아있는 꽃. 그치만 곧 사라져 잊혀질 것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 이제 더 이상 시들지 말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라도 웃음을 잃지 않도록 당부를 하고 있다. 작가의 꽃사랑이 절절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산구절초

o 연적봉 → 경일봉 오후 2시, 빗줄기가 점점 드세지기에 더 이상 막연히 기다릴 수 없어 연적봉에서 내려온다.

연적봉

곧이어 탁필봉과 자소봉 밑둥치로 이어지는 등로로 전진한다.

탁필봉

자소봉

자소봉 아래 석굴형태로 패여진 곳에는 산객들이 비를 피해 대기하고 있다. 그곳을 지나니 삼거리 이정표가 나온다. 우측은 청량사로 하산하는 길, 직진은 경일봉으로 향하는 길이고, 이정표에 표시되진 않았지만 좌측으로 오르면 자소봉 정상석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비를 피하고 있는 산객들

삼거리 이정표

좌측으로 올라가니 철계단이 나오고 그 철계단을 타고 오르니 평평한 암반 위에 자소봉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오후 2시12분)

자소봉 정상석

실제 자소봉 정상은 그 뒷편에 솟아 있으나 위험해서 오르지 못한다.

자소봉 정상(845m)

그곳에서 바라보는 조망.. 운무와 빗줄기 너머로 희미하나마 탁립봉인 듯 싶은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맨 왼편에 있는 봉우리가 그것인 듯 싶다.

탁립봉

자소봉에서 내려와 서둘러 동쪽 능선으로 전진한다. 등로는 비에 흠뻑 젖어 질퍽거리기 시작한다. 그 즈음부터 PDA가 비에 젖었는지 동작을 하지 않는다. 이제 GPS의 도움 없이 이정표에 의지하여 등로를 찾아간다.

등산로 이정표

비에 젖은 등로

오후 2시38분, 경일봉에 이른다. 그 사이 두어 개의 나즈막한 봉우리를 넘어선 듯 싶다. 경일봉(擎日峰)은 매년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에 유리보전 앞 연대에서 보면 해가 이 봉우리 위에 뜨기 때문에 주세봉선생께서 '빛나게 떠오르는 해를 인도하다(寅賓旭日)'라는 뜻을 취하여 지은 이름이라 한다.

경일봉 정상석(750m)

연적봉으로부터 이곳까지 함께 이동하여 온 한뫼사랑 산악회원들과 기념사진을 찍는다.

경일봉 - 청려장, 한뫼사랑 산악회원 1,2

o 경일봉 → 산꾼의집 오후 2시40분, 경일봉에서 하산한다. 등로 우측 노송 사이로 연화봉에서 뻗어내려온 암봉과 하산 목적지인 하청량이 얼핏 시야에 들어온다.

연화봉과 하청량

10분 가량 내려오니 등로가 우측으로 꺽이고 그 아래로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우측으로 꺽이는 길

나무계단

나무계단을 타고 2분 가량 내려가니 다시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청량사와 응진전은 직진, 김생굴은 우측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지만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김생굴 갈림길

오후 2시54분, 김생굴쪽으로 전진하던 중 등로 우측 산기슭에서 사진 촬영에 열중인 한 분을 발견한다. 무엇을 찍고 계시냐고 물어보니 세뿔투구꽃이라 한다. 그가 찍고 있었던 모델을 들여다보니 여늬 투구꽃과 달리 잎 모양이 갈라지지 않고 꽃잎은 우유빛에 가깝다. 그분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온 뒤 나도 그곳에 올라가 정성껏 그 모습을 담아보지만 쉽지 않다. 카메라가 비 때문에 습기가 가득차 있어 상태가 좋지 않고, 더구나 피사체가 흰색이다 보니 선명하게 그 모습을 담지 못하였다.

세뿔투구꽃 1

세뿔투구꽃 2

세뿔투구꽃(별칭 금오오돌또기, 미색바꽃).. 경상남북도, 전라남도의 산 숲 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한다. 주로 조금 습하고 돌무더기가 있는 곳에 자란다. 줄기는 곧추서거나 비스듬히 서며, 가지가 갈라지지 않고, 높이는 60~80cm이다. 잎은 어긋나고, 오각형이나 삼각형인데 위로 갈수록 삼각형이 되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8~9월에 잎겨드랑이에서 난 꽃차례에 투구모양의 노란빛이 도는 보라색 꽃이 핀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받침이며 모두 5장이다.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투구꽃속 식물들에 비해 잎이 가늘게 갈라지지 않고 오각형 또는 삼각형이라서 세뿔투구꽃이라 한다. 구미 금오산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하여 금오오돌또기라 부르기도 하고, 색깔이 연하여 미색바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국 특산'의 귀하신 몸이다. .. 쇠뿔투구꽃과 헤어진 뒤 김생굴쪽으로 간다. 조금 가다보니 어느 암벽 앞에 김생폭포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암벽 사이가 다소 습해보이지만 물이 전혀 흐르지 않는 공갈폭포다. 예전엔 물이 흘렀었나보다.

김생폭포

바로 옆에 김생굴이 자리하고 있다. 김생은 신라시대의 명필로 예서(隸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불렸으며 송나라에서도 왕희지(王羲之)를 능가하는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 김생이 이곳에서 10년동안 글씨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경일봉 중층에 위치한 이곳은 상하가 절벽으로 되어 있고 그 중앙으로 수십 명을 수용할 만한 반월형의 자연암구로 형성되어 있다.

김생굴

이 굴 앞에 암자를 짓고 글씨공부를 하던 김생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인 '김생필법(金生筆法)'을 확립하였다. 그는 당시 왕희지체, 구양순체가 유행하던 시기에 청량산의 모습을 본뜬 독특한 서법을 구사함으로써 가장 한국적인 서풍을 이끌어 냈으며, 이로 인해 해동서학의 종조(宗祖)로 여겨져 한국서예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그의 글씨체는 청량산 정상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청량산 정상석에 집자된 김생의 글씨체

그와 관련하여 내려오는 전설을 옮겨 적어보면.. 김생이 이 바위굴에서 글씨공부에 전념한 지 9년만에 명필이 되었다는 자신감을 갖고 하산하려 하였다. 그 때 한 젊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길쌈 솜씨와 글씨 솜씨를 겨루어보자고 제의하였다. 그 처녀는 바로 청량봉녀(淸凉縫女)였다. 김생은 처녀의 제의를 수락하여 굴속에서 불을 끄고 서로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이윽고 불을 켠 뒤 비교해보니 처녀가 짠 천은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 하였는데, 김생의 글씨는 그 만큼 고르지 못하였다. 이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김생이 1년을 더 연마하여 10년을 채운 뒤 명필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명필 한석봉과 그의 어머님의 가르침과 관련한 전설과 흡사하다. 하긴 이름만 다르고 내용이 거의 유사한 전설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던가? 전설은 전설이다.

김생굴 내부

김생굴 (글 류 희지)

김생굴 맞은 편에 전망이 좋은 곳이 있다. 그곳에 서면 산자락 한가운데 자리잡은 청량사가 내려다보인다. 어느덧 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빗줄기는 한두 가닥 내리고 짙은 운무도 걷히고 있다.

청량사

오후 3시06분, 갈림길로 되돌아온 뒤 청량사쪽으로 내려간다. 우선 청량사 근처에 있는 산꾼의 집을 들른 뒤 되돌아와서 응진전으로 갈 요량이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5분 가량 내려가니 청량사가 가까이 보이고..

청량사

곧이어 "청량산 달마원"이라는 전단지를 문패 삼아 걸어놓은 산꾼의집이 나타난다.

산꾼의집

"청량산 달마원"

울타리 안에 들어선다. 장독대 앞 나무판에는 "약차 한잔 그냥 들고, 쉬었다가 가시구랴"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산꾼의 집

마당 우측에 있는 창고 안에는 각종 소품들이 그득하다.

산꾼의집 창고 1

산꾼의집 창고 2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한 남자와 두 여자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한 남자가 벽에 걸려있는 사진 속의 주인공인가 보다. 사진으로 볼 때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실물을 보니 아니다. 그 중 한 여자가 차려주는 차 한잔을 홀짝 홀짝 마시며 장식물들을 감상한다. 벽에 걸려있는 달마도를 비롯한 붓글씨 작품들이 모두 저분의 작품인가 보다.

산꾼의집 내부

달마도

조각작품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눈에 확~ 띄는 것은 이것! 참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

넘치면 갈비만 남느니라!

커피잔을 싱크대에서 씻고 난 후 찻잔 건조대에 얹어놓은 뒤 '고맙게 잘 먹었습니다'하며 인사치례를 하곤 밖으로 나선다. 나도 언젠가 은퇴를 하면 산속에서 살아야겠단 생각을 한번씩 품어보곤 하는데 이분이 롤모델이 될 듯도 싶다. ^^ .. 산꾼의집 담장 옆에는 청량정사가 있다. 수리 중인 관계로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 담장 너머로만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수리중인 청량정사

청량정사는 퇴계 이황이 청량산에 유산(遊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림(士林)들이 논의하여 1832년(순조 32)에 건립하였다. 이후 청량정사는 선생의 뜻을 기리는 많은 후학들에게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되었으며 구한말에는 청량의진(靑凉義陣)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 건물은 1896년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되어 있으며, 본체는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왼편에 지숙료(止宿寮)를, 오른편에 운서헌(雲棲軒)을 두었다. 당호(堂號)는 오산당(吾山堂)이다. o 산꾼의집 → 응진전 오후 3시16분 청량정사에서 청량사쪽으로 향하다가 일행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청량사는 이미 둘러보았으므로 발길을 되돌려 홀로 응진전으로 향한다. 산꾼의집 앞에서 시작되는 가파른 오르막을 빠른 걸음으로 3분 가량 치고 오르니 응진전 갈림길이 나온다.

산꾼의집앞 이정표

응진전 갈림길 이정표

응진전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조금 전진하니 어풍대(御風臺)가 나온다. (오후 3시27분) 금탑봉 중층에 위치하고 있는 어풍대는 내청량과 외청량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활을 하는 곳이다. 청량지(靑凉誌)의 기록에 따르면 열어구(列御寇: 고대 중국의 인문)가 바람을 타고 보름동안 놀다가 돌아갔다고 하여 이름 지어졌다 한다. 이곳에서 청량산의 연꽃 같은 봉우리와 연꽃 꽃술에 자리한 듯한 청량사의 모습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카메라 습기를 잔뜩 먹어 상태가 좋지 않고 능선이 역광으로 비추다보니 청량사를 뒤에서 든든히 보필하고 있는 자소봉, 탁필봉, 연자봉의 위용을 제대로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청량사와 자소봉

연적봉, 탁필봉, 자소봉

다만 그 아래 청량사는 카메라가 그런대로 온전히 전경을 담아준다.

청량사

Zoom으로 땡겨보니 유리보전, 선불장, 산신각, 범종각 등의 전각과 오층석탑, 삼각우총이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청량사 (Zoom-Up)

계속해서 응진전쪽으로 전진하니 총명수(聰明水)가 나온다. 금탑봉 중층에는 신라 말 대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崔致遠, 857~?)에 관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와 관련한 유적으로는 치원암(致遠庵), 총명수(聰明水), 풍혈대(風穴臺)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 총명수는 최치원이 마신 뒤 더욱 총명해졌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과거 준비를 하던 선비들은 물론 경향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세모꼴의 바위 틈새를 들여다보니 물이 조금 고여 있는데 깨끗해 보이진 않는다. 옛날엔 맑고 시원한 물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먹지 못하는 썩은 물로 남아있을 뿐이다. 유구한 세월 속에 자연은 변하는 것이니..

총명수 입구

총명수

오후 3시33분, 응진전에 이른다. 응진전(應眞殿)은 일명 외청량사라 하며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원효대사가 청량사와 더불어 창건한 암자이다. 고려 말 1362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공민왕을 따라 이곳까지 몽진온 노국공주가 시녀들과 더불어 손수 16나한을 깎아 응진전에 모시고 총건적 퇴치와 국가안녕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응진전엔 노국공주 상을 안치해 놓았다고 한다.

응진전

응진전 내부를 들여다보니 삼존불 좌우로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노국공주가 손수 깎았다는 바로 그 나한들인지는 잘 모르겠다. 노국공주는 원나라 위왕의 딸로서 공민왕과 결혼한 뒤 고려의 왕비가 되었지만, 10년 가까이 애기를 낳지 못하여 괴로운 시절을 보내다가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이곳까지 내려와서 살게 된 것이다. 차후 난이 수습된 뒤 개경으로 돌아가 아이를 갖는 기쁨이 있었지만 그 기쁨도 잠시 아이를 낳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나한들을 바라보며 참으로 비련한 여인의 손길을 잠시 느껴본다.

나한 1

응진전 삼존불

나한 2

응진전 뒤에는 높다란 절벽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자그마한 돌이 상투처럼 얹혀있다. 그것이 바로 동풍석(動風石)라고 불리는 바위다. 옛날 어떤 스님이 지금의 응진전 자리에 절을 지으려 했으나 건들바위가 위험해서 망설이다가 하루는 힘이 장사인 그 스님이 위로 올라가서 건들바위를 밀어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음날 공사를 시작하려고 가 봤더니 건들바위가 도로 그 자리에 올라가 있는게 아닌가? 이에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고 하는데, 이후 원효대사는 그 건들바위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외청량사(응진전)를 지었다고 한다.

동풍석(動風石)

응진전 옆에 무위당이 있다. 응진전의 요사채인 모양이다.

무위당

높다란 암봉 아래 자리잡은 모습이 아름답다.

무위당과 암벽

o 응진전 → 입석 오후 3시41분, 응진전에서 하산한다. 그 즈음 만난 돼지감자. 꺽다리 줄기 끝에 노란 꽃을 피워놓고 있다.

돼지감자꽃

돼지감자꽃

응진전에서 10분 가량 내려오니 또 하나의 전망대가 나온다. 스텐레스봉으로 난간을 가로막은 그곳으로 들어가니 금탑봉과 응진전이 조망된다. 그 모습이 절묘하다. 금탑봉(金塔峰)은 계곡쪽에서 올려다보면 층암절벽이 삼층으로 이루어져 삼층탑과 같이 보인다고 한다. 그 중층(中層)에 응진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금탑봉과 응진전 1

금탑봉과 응진전의 어울림이 볼 수록 절묘하고 아름답다.

금탑봉과 응진전 2

그 전망대에서 산자락 아래를 내려다보면 청량사 계곡이 있다. 중간 즈음에 있는 선학정과 멀리 하산 집결지인 하청량(청량폭포 부근)이 얼핏 시야에 들어온다.

계곡과 선학정

다시 하산하는 길.. 기나긴 침목 계단을 따라 붉은 연등이 걸려있다.

하산길과 연등

오후 3시50분 산자락을 벗어나 입석에 이른다. 입석은 도로 건너편에 외따로이 서 있다.

입석

입석 맞은편에 세워진 조감도를 보면서 지나온 길을 잠시 더듬어본다.

조감도 - 지나온 길

o 입석 → 하청량 오후 3시 52분, 포장도로를 따라 하산집결지가 있는 서쪽으로 향한다. 도중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남쪽 산능선을 올려다보니 낭떠러지 절벽이 눈에 띈다. 저곳이 아마도 밀성대인 모양이다.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온 후 청량산 축륭봉에 산성을 쌓은 뒤 소금과 식량을 비축하며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당시 말을 듣지 않는 군졸이나 백성들이 좀 있었나보다. 그러한 반역자들을 저 바위에서 밀어서 처형을 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밀성대

오후 4시01분, 선학정을 지나고..

선학정 직전

계속해서 하청량쪽으로 내려가다 뒤돌아서서 북쪽 산능선을 바라본다.

암봉 1

비가 언제 내렸냐는 듯 하늘은 어느덧 맑게 개여있다. 파란 하늘 아래로 솟아있는 암봉들은 더욱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암봉 2

계속해서 내려가는 길.. 버스 차장에 '대전고야구부 화이팅'이라는 글을 써놓은 버스를 만난다. 반가운 마음에 버스 앞으로 돌아가보니 일반 등반객 몇몇을 태우고 있다. 야구부 전세버스지만 주말을 맞아 별도 영업을 하는 모양이다. 나의 모교 대전고. 그 시절 야구장에 가서 목이 터지라고 응원하던 것이 생각난다. 어느덧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때의 열기와 혈기를 떠올리면 아직도 흥분이 된다.

대전고야구부 버스

대전고야구부 버스

오후 4시08분, 산악회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하청량에 도달하여 비로소 산행을 마친다.

하청량 - 산악회버스

o 뒷풀이 약속했던 복귀시간(오수4시)보다 다소 늦었던 바 회원들은 모두 뒷풀이 장소인 음식점에 모여있다. 비 때문에 대부분 중간에 하산한 모양이다. 씻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합석하여 미안한 맘을 표한다. 돼지찌개 한 그릇과 막걸리 두어 잔을 마신 후 밖으로 나와 주차장 아래 계곡 속으로 들어간다. 시원히 알탕을 한 뒤 옷을 갈아입고 나니 개운하다. 주차장 옆에는 펜션이 하나 있다. 들꽃피는 펜션. 이름에 걸맞게 펜션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다. 빨간 우체통도 있고..

들꽃피는 펜션

그 안에서 빨간 매리골드와 노란 매리골드가 경염을 펼치고 있는데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다. 둘 다 이쁘이..

빨간 매리골드

노란 매리골드

☆ 산행 요약 오후 4시08분, 하청량에 당도함으로써 청량산 산행을 마쳤다. 총 산행거리는 10.4km, 산행시간은 중식 및 기타 지체시간(1시간33분)을 포함하여 총 4시간34분 소요되었다.

산행경로

☆ 쫑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로다 백구가 훤사(喧辭)하랴마는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주자(魚舟子)가 알까 하노라 청량산. 너무 멋진 곳이어서.. 퇴계선생의 당부대로 그 비경을 훤사하지 않는 것이 쉽지 않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