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묘역 방문기 - 바다 울음"
o 일시: 2009.11.05(목) 16:25 ~ 17:20
o 날씨: 맑음 11.9℃~20.4℃ (경남 통영)
o 행적: 충무마리나리조트→박경리묘역
o 지도
I. Intro..
심포지움에 참석차 통영에 내려왔다.
오후 4시20분경 기술세션이 끝나고 특별공연이 시작되기에 동료와 함께
슬그머니 강연장을 빠져나온다. 막간을 이용해 박경리 선생의 묘역을 찾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묘역 위치를 따져보니 심포지움 장소인 충무마리나리조트에서 20여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다.
지난해 5월 모진 세월을 접고 영면에 드신 박경리선생. 그분을 만나뵈러 간다.
II. 묘역 가는 길
미륵도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1021번 지방도를 타고 남쪽으로 10분 가량 가면
몇 척의 고기배가 정박해 있는 작은 포구가 나온다. 신양면 신전리 신봉마을이다.
그곳 신전삼거리에서 지방도를 벗어나 우측 길로 들어서서 5분 가량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우측에 농원입구가 나온다. 그곳이 바로 박경리묘역이 위치한 양지농원 입구이다.
농원 안으로 들어서면 양지펜션 안내판이 나온다. 양지펜선은 농원에서 운영하는 펜션인가보다.
박경리 선생이 타계하자 이곳 농장주인이 고인을 위해 자신의 사유지를 아낌없이 내놓았다고 한다.
통영시는 이 사유지에 박경리 추모공원을 조성하였고, 내년엔 '박경리 문학관'을 건립할 계획이라 한다.
간판 아래에 '박경리 추모공원'을 가르키는 화살표가 보인다.
그 주변에 차를 주차한 뒤 화살표 방향으로 걸어간다.
반대편에 40~50대 가량 되는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짝을 짓고서 내려오고 계신다.
묘역에 갔다오시는 분들인 것 같다.
길가에 피라칸다가 열매를 맺어놓았다.
빨간 열매가 바글바글 매달려 있다.
나즈막한 길마루를 넘어서니 동백나무 울타리가 이어진다.
그런데 보통 보던 빨간색의 홑꽃이 아니다. 겹꽃잎이 연분홍 또는 순백으로 물들어 있다. 겹동백이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사람 키 만한 패널이 보인다. 묘역 입구인 모양이다.
패널 안에 담겨진 박경리 선생의 연보를 훑어본다.
참으로 많은 역작을 남기셨다.
연보 옆 몇 컷의 사진들이 선생의 인생역정을 형상화하여 떠올리는 것을 미약하나마 도와준다.
제복 입은 소녀시절, 책상 앞에 앉아 집필 중인 모습,
무공해 농사 짓던 모습, 통영에 방문하여 강연하던 모습,
마지막 해에 힙겹게 산책하시는 모습, 원고지 위에 놓여진 필기구와 안경,
그리고 한산도 제승당에서 한산 앞바다를 응시하고 계시는 모습..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정말 모진 역정을 닫고 그렇게 홀가분하게 떠나신 분이다.
패널 옆에 네 개의 항아리가 놓여 있다.
그 뒤에 "남기신 글이 있으면 단지 속에 넣어주세요"라 쓰여있는 안내문이 보인다.
항아리를 열어보니 각양의 글씨체로 쓰여진 추모 글이 담겨있다.
추모객들의 한결같은 마음이 읽혀진다. "편히 잠드세요."
그 뒷편에 공원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안내도 위에 얹어진 초가지붕이 소설 "토지" 속의 평사리 마을을 떠오르게 한다.
주변의 석축에는 송엽국이 진보라빛 길쭉한 꽃잎을 사방으로 늘어뜨리고 있다.
세멘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산기슭 방향으로 천천히 걷다보니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있는 커다마한 바위가 보인다.
그 위에 선생의 유고시 "옛날 그 집"이 새겨져 있다.
"옛날의 그 집"
빗자루 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선생께서 타계하기 직전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한 신작시다.
생의 말년에 얻은 무욕과 달관의 철학을
홀가분하게 노래한 시라고 한다.
'옛날의 그 집'은
선생께서 1994년 8월15일 대하소설 "토지"를 탈고한
강원도 원주의 단구동 집(현재 토지문학공원)을
가르킨다고 한다.
고인의 약력에 종종 곁들여지고
또 영정사진으로도 채택되었던 사진은
'바로 그 집'에서 무공해 농사를 지을 때
고추를 수확하는 모습을 담은 것 같다.
다시 모퉁이를 돌아 올라간다. 길가에 벤치가 놓여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벤치 맞은 편에 또 하나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비 앞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베고니아..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던" 선생의 인생역정을 슬퍼하며
붉디 붉은 빰을 눈물로 적시고 있는 듯 싶다.
"눈먼 말"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
선생께서는 고통스런 삶 속에서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오셨단다.
「사기(史記)」를 완성한 중국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은
궁형(宮刑)의 치욕을 감수하며 삶을 이어갔지만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망가져 쓸모없게 되었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최고의 역사(歷史)이자 문학인 「사기(史記)」는 이 같은 사마천의 한이 녹아 이루어진 역작이라 한다.
박경리 역시 천형(天刑) 같은 삶을 삭혀 「토지」에 담았고,
힘들 때마다 사마천을 생각하며 자신을 다그쳤다고 한다.
글기둥을 잡고 씨름을 하다 풀어 놓은 주옥 같은 글을 당신 스스로 '눈먼 말'이라 하시는 것은
그 속에 당신의 한(恨)이 오롯히 담겨 있음을 말씀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
다시 길이 오른쪽으로 꺽이는 모퉁이 즈음에 동판시비가 있다.
"우주만상 속의 당신"이라는 글이 담겨 있는 친필원고를 동판으로 박아놓았다.
고인의 친필을 대하니 느낌이 남다르다. 꿈틀꿈틀 그어진 글씨 속에 한이 배어있는 것 같다.
"우주만상 속의 당신"
내 영혼이 의지할 곳 없어 항간을 떠돌고 있을 때
당신께서는 산간 높은 나무가지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
당신께서는 산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생사를 넘나드는 미친 바람 속을 질주하여 울부짖었을 때
당신께서는 여전히 풀숲 들꽃 옆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진작에 내가 갔어야 했습니다.
당신 곁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찔레덩쿨을 헤치고 피 흐르는 맨발이라도
백발이 되어
이제 겨우 겨울 당도하니
당신은 아니 먼 곳에 계십니다.
절절히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아직
한발은 사파에 묻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처음엔 '당신'이란 분이 전쟁 중에 잃은 남편을 지칭하는 줄 알았다.
50여년 전에 행발불명된 그분을 여짓껏 그리워하며 지내셨나보다 생각했는데,
행간을 훑으며 더 읽어보니 당신은 그분만이 아닌 것 같다.
사별 후 삼십여 년 뒤 꿈 속에서 찾아 헤맸다는 어머니라는 존재도 있다.
그러고 보면 우주만상 속의 당신은 남편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수도 있고,
또는 자신의 이상향을 완성시켜주는 절대자일 수도 있다.
당신이 누구가 되었던지 고인은 필시 '당신'을 따라가셨을 것 같다.
"어머니"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 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주변에 이름이 알송달송한 꽃이 피어있다. 하나는 강렬하고, 다른 하나는 수수하다.
저들에게 '당신'은 누구였을까? 꽃과 나비일 수도 지나는 행인일 수도 있으리라..
곧이어 어록비가 나온다.
너럭바위 앞 뒷면에 "마지막 산문" 중에 발췌한 글이 새겨져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다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능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물질로 가득 차 있습니다.
피동적인 것은 물질의 속성이요, 능동적인 것은 생명의 속성입니다."
고인께서는 생명체의 속성과 운명의 근원을 우리민족의 집단적인 한(恨)에서 찾으셨다.
용이와 월선이의 애틋한 사랑, 서희와 길상이의 애증은
선생님 자신이 겪은 한을 능동적으로 표출한 것이리라..
현세에 머물지 않는 한(恨)이 근원적인 생명력이니
이를 능동적으로 승화시켜야 함을 가르쳐주시는 것 같다. ..
봉분이 보인다.
홀로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봉분이 선생의 것인 듯 싶다.
봉분으로 이르는 길가에 해국이 연보랏빛 꽃을 일제히 피워놓고 추모객을 맞아준다.
해국(海菊).
이 땅의 꽃 중에서 가장 바다 가까이 걸어간 꽃이라 하던가?
자신의 종교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순교자처럼 해국은 땅의 끝에서 꽃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고
정일근 시인께서는 말씀하신다. 잎 양면에 부드러운 털이 촘촘이 나 있는 것은
짭조름한 갯바람과 해풍에 견디기 위함일 것이다. 꽃말은 이별 또는 기다림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태생적 슬픔을 안고 피어난 해국이야 말로
한 많은 삶을 접고 사파(娑婆)와 이별을 하신 고인의 마지막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꽃인 듯 싶다.
애닳은 이별과 간절한 그리움을 간직한 꽃이라 하니..
III. 묘역에서..
묘역은 넉넉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단출하여 고적함이 흐른다.
아담한 높이의 봉분과 뒷편을 빙 두른 흙벽에 소박함이 뭍어 있다.
고인께서 화려한 것을 싫어했고 유족의 뜻도 다르지 않아 이렇듯 단출하게 조성한 것이라 한다.
봉분 앞에는 고인의 이름과 생몰일을 적어놓은 검은 대리석이 있다.
한자로 갈겨쓴 글씨는 고인의 자필인 듯 싶다.
그 오른쪽에는 화강암 상석(床石)이 자리잡고 있다.
상석(床石) 위에는 일회용 접시가 놓여 있는데
그 안에 비스켓, 감, 사탕, 초코렛, 키위, 동백꽃, 솔방울 등 각종 예물이 담겨있다.
추모객들이 즉흥적으로 얹어놓은 것들이리라..
즉흥적이라지만 고인의 넋을 기리는 애틋한 맘만은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분이니 빈 손으로라도 찾아온 객들을 넉넉히 받아주시리라..
봉분 뒷편으로 올라가 되돌아보니 소나무 사이로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통영을 떠나 외지에서 살아온지 50년. 말년들어 고향 통영을 방문하던 중
이곳을 다녀가시며 '쉬어가기 참 좋은 터'라 하시곤 영원한 안식의 자리로 이곳을 낙점하셨다고 한다.
전방에 마치 호수처럼 보이는 통영 앞바다는 통영만이다.
그 주변을 내륙쪽에 신전리 마을, 바다 너머 한산도 남단 하포마을, 용도초 용초마을이 에워싸고 있다.
묘역 아랫단에 덩그라니 놓여있는 나무 벤치에 앉아
골똘히 바다를 응시하시는 선생의 모습이 얼핏 그려진다.
자그마한 포구를 끼고 있는 신전리의 양촌, 음촌, 남촌 마을.
그 부근에 연기가 아물아물 피어오른다. 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었나보다.
한산도, 용초도, 신전리 마을이 둘러싸고 있는 통영만은 푸르른 물결을 담은 채 잔잔하다.
그 위로 떠가는 배 한 척이 여유롭고 평안해 보인다.
이제 작가는 '눈먼 말'을 뽑아내기 위한 연자매질을 멈추고
고향의 맑고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쉬고 계신다.
고향의 산과 바다와 섬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화답하며 지내시는 것도 또 하나의 삶이 되겠지요.
다른 세상이겠지만..
IV. 쫑
바다 울음
- 박경리
바다 우는 소리를 들었는가
어떤 사람은
울음이 아니요
샛바람 소리라 했지만
나는 지금도 바다울음으로 기억한다
수평선에 해 떨어지고
으실으실 바람이 불면
바다는 물을 치고
울부짖었다
아직도 바다 울음소리가 들리나요?
부디 평안한 잠 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