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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기타

상경기(上京記) - 재수생 아들

by 청려장 2009. 12. 8.

"상경기(上京記) - 재수생 아들"

I. 2009.11.14(토) 오전 10시경, 아들과 함께 상경한다. 재수생인 아들. 1년 동안 더 공부를 했는데도 가채점 해본 수능성적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니 상심이 큰 듯 보인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서울 대학가의 학원에서 실기준비를 하기로 하였기에 하루 푹 쉬고 내일(일요일) 올라가라 하지만 아들은 극구 오늘 올라가야겠다고 한다. 저조할 것 같은 성적 때문에 대전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꺼려지는 모양이다. 할 수 없이 토요산행을 접고 와이프와 아들과 함께 승용차에 짐과 봇따리를 바리바리 싣고서 오늘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다. 토요일이라 이천부근부터 차량이 엄청 밀린다. 결국 4시간 남짓 걸려서야 마포구에 있는 한 고시원 앞에 도착한다. 고시원은 언덕배기 중턱 즈음에 자리잡고 있다. 대학가라 그런지 그 주변에도 유사한 구조의 고시원들이 눈에 많이 띈다. 일단 정문 안으로 들어가 관리실 앞에서 입방 수속을 밟고 주의 사항을 듣는다. 실내에서 술담배 금지, 취사금지, 외부인 출입금지 등등..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들이다.

쉐르빌 고시원 정문

복도

배정 받은 3층의 방으로 올라가본다. 여관 같이 비좁은 복도에 들어서서 방번호를 확인하니 샤워장 바로 옆 방이다. 늦은 밤에 누군가가 샤워를 하면 물 소리가 꽤 크게 들려서 공부나 취침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와이프가 관리실로 내려가 다른 방은 없냐고 물어보니 남아 있는 방은 복도 끝 골방 밖에 없다한다. 그런데 아들이 그 방은 왠지 싫다며 극구 지금의 방을 쓰겠다고 한다. 싫다니 할 수 없지.. 결국 원래 배정된 방으로 결정한다. 방안엔 책상, 책꽂이, 침대가 서로 엇물린 채 비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침대는 한 사람이 드러누우면 딱 알맞을 정도의 너비와 높이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짐을 옮겨 놓으니 방안을 가득 메워 셋이 앉을 자리 조차도 마땅찮을 정도다. 오전에 학원에 나가 밤 10시에 돌아오기 때문에 홀로 늦은 밤의 공부와 취침만 하기 위한 임시거처이니 지낼 수 있으리라..

방 내부

침대위 칸막이에는 구형 TV 셋 하나와 소형 냉장고 하나가 얹어 있다. 냉장고는 아침에 고시원측에서 밥만 제공하기 때문에 각자 준비한 반찬을 저장하기 위해 필요한 비품이다.

TV와 냉장고

창 밖

책상 위에는 커튼이 드리워진 붙박이 유리창이 있다. 커튼을 젖혀 창 밖을 보니 맞은 편에 또 다른 고시텔이 있고, 그 옆 골목으로 대학생들이 오가고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다 자유분방하게 거니는 대학생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심란해질 것 같아 우려스럽다. 앞으로 3개월. 최전선에 뛰어들었으니 동요가 없어야 할 텐데..

쉐르빌 고시원 전경

대전으로 내려오는 길.. 15년전쯤 처음으로 부모 품에서 떨어져 유아원으로 가던 어느 날이 기억난다. 제대로 유아원까지 걸어갈 수 있을런지.. 유아원에서는 선생님 말을 잘 들을런지.. 엄마 아빠 찾으며 칭얼대지는 않을런지.. 이제 성년이 된 아들에게 그러한 안스러움이 다시금 드는 것이다. 밥은 잘 차려먹을지.. 학원엔 잘 적응할런지.. 주변 대학생들에게 현혹되지는 않을런지.. 잘 견디어 내서 부디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를 바랄 뿐이다. II. 2009.12.03(목) 오전 10시경, 온 가족이 다시 상경한다. 어느새 아들이 상경한지 20일이 지났다. 그 동안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스러웠고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그리고 보고 싶기도 하였고.. 그러던 차, 며칠전 서울서 오늘 개최되는 공청회 참가자를 모집하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진해서 손을 들었던 것이다. 차제에 와이프와 딸래미까지 대동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다. 어미는 청소 좀 해줘야한다며.. 딸래미 서린은 서울 구경 좀 하고 싶다며.. 실은 서린도 고3 수험생이다. 얼마전 수시에 응시하여 면접까지 마친 상태라 요즘 팡팡 놀고 있는 백수건달(?)이다. 오후 1시경, 마포구에 있는 고시원에 도착한다. 아들 슬찬이 학원에 가고 나서 비어 있는 방. 그 비좁은 방에 온갖 짐들이 제멋대로 널려있어 난장판이다. 일단 반찬을 비롯한 몇가지 짐을 옮겨놓은 뒤 와이프와 서린을 남겨두고 나홀로 양재동 서울 교육문화회관으로 간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원자력안전종합계획" 관련 공청회가 오후 5시경 끝난다. 서둘러 밖으로 나서려는데 한 후배가 차 없이 전철역으로 가려 하기에 그를 양재역까지 태워준다. 이후 마포구쪽으로 승용차를 몰고 가는데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도로가 무척 밀린다. 오후 6시, 딸이 핸드폰으로 알려온 고시원 부근 식당에 도착한다. 슬찬이 먹고 싶다며 지목한 조개구이 식당에 모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한다. 지어미가 익어가는 조개를 자꾸만 아들에게 밀어주고 자신은 먹지도 않고 있으니 아들이 자꾸 사양한다. "제가 알아서 먹을 테니 엄마나 잘 드세요." 그나저나 아들 행색이 너무도 초라해보인다. 몸도 더욱 여위어진 것 같고.. 상경할 당시에 다소 길었던 머리를 그대로 놔두었던지 뒷머리가 어깨 아래까지 늘어진 상태다. 서린의 말로는 따서 묶어도 될 것 같다고 한다. 옷도 허깨비같이 얇고 틈실하지 않아 점차 추워지는 날씨에 감기 걸리기 꼭 알맞을 정도다. 다시 학원에 들어가서 야간수업을 받아야 한다는데 아무래도 그냥 들여보내서는 안 될 것 같기에 내가 학원선생께 양해를 구할 테니 오늘 야간수업은 빼먹고 머리 좀 깎고 옷 좀 사러 가자고 한다. 차제에 휴일 없는 학원생활에 하루 정도 숨통을 틔어주고 싶은 맘도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학원선생께 전화를 하니 받지 않으신다. 수업중인 모양이다. 할 수 없이 예의는 아니지만 선생께 문자를 보내 양해를 구한다.

문자

식사를 마치고 미장원으로 간다. 미용사에게 가급적 짧게 깎아달라고 주문하니 녀석이 뒷머리만 살짝 쳐달라고 어긋장을 놓는다. 짜슥이.. 녀석의 변은 머리를 가급적 길게 해서 남들이 자기 얼굴을 모르게 하고 싶기 때문이라 한다. 별 호랑말콩 같은 생각을 다 한다.

머리 깎기 전

머리 깎기 직전

잠시후 머리를 다 깎았다며 의자에서 내려와 머리를 감으러 가려는 녀석을 보니 깎는 흉내만 낸 상태다. 툇자를 놓고선 미용사에게 좀 더 깎아 줄 것을 주문한다. 결국 다시 더 깎고선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 이제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 나 보다도 더 머리길이에 엄격한 와이프도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냥 용납해주겠다는 무언의 OK 싸인이다.

깎고 난 후 (뒷 모습)

깎고난 후 (옆 모습)

미용원에서 나와 겨울파카를 사주기 위해 스포츠 매장을 찾아간다. 매장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대학가. 구멍가게, 카페, 술집 등이 제 각기 휘황찬란한 조명을 내걸고 있다.

대학가

파카 하나를 사준 뒤 고시원으로 돌아온다. 난장판 같았던 방이 이제 깔끔하게 정리되어 사람이 사는 방 같아 보인다. 지에미가 낮시간에 고생 좀 했을 것 같다.

깔끔히 정리된 방과 아들

아들 - 슬찬

아들 얼굴을 자꾸만 쳐다본다. 어느덧 콧수염이 꺼뭇꺼뭇하여 성년티가 더럭더럭 난다.

슬찬 1

슬찬 2

비좁은 침대에 모두 모여 앉게 하고 사진을 찍는다. (서린의 강력한 초상권침해 주장에 따라 얼굴을 비공개함. 대신 깜찍했던 어릴적 사진으로 대체 ^^)

엄마와 남매

서린이 아빠와 오빠를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를 건네받는다. 첫번째 사진은 아빠 얼굴이 맘에 안든다며 다시. 결국 활짝 웃는 두번째 사진에 흡족하며 OK! ^^

부자 1

부자 2

밤 9시경, 아쉽지만 이제 대전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아들을 홀로 남겨두고 고시원 밖으로 나선다. 정문 밖으로 나오는 서린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니 얼굴을 획~ 돌린다. "아빠! 살 빠질 때까지 사진 안 찍을 거예요. 소개팅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뺄꺼야.." 흐~ 그래 기대해보마.. 정문 밖에서 엄마로부터 몇가지 당부를 듣고 있는 아들의 얼굴은 조금씩 어두워진다. 잘 지내거라..

서린

슬찬

아들을 홀로 남겨두고 대전으로 가는 길. 서린이 숭례문을 보고 싶다며 들렀다 가자고 한다. 우리 가족이 작년 2월 서린의 생일을 맞아 일본 도쿄로 여행갔었는데, 그 당시 숭례문에 화재가 났었던지라 숭례문에 대한 소식이 남다르게 들리곤 하였다. 지금 복원작업이 한창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린이 어디서 들었는지 최근 지붕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네비에 의지해서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숭례문은 울타리가 사방으로 둘러쳐져서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만난 보신각과 독립문이 역사적 유물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였고..

보신각

독립문

명동 부근의 멋진 조명은 우리 가족의 '촌스런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명동 거리

조선호텔

밤 10시경, 남산 제3호 터널을 통과하여 대전으로 향한다. 긴 하루가 어둠 속으로 잠들어가는데..

남산 타워

남산 제3호 터널

다시 홀로 남겨둔 아들의 어두운 얼굴이 자꾸만 운전대 너머 유리창에 어른거린다. 힘 내거라! 잘 해내겠지.. 아들에겐 홀로서기가 시작된 것이고, 부모에겐 물러서기가 시작된 것인가?

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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